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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박쥐도 '헌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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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박쥐도 '헌혈'을 한다

입력
2000.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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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동물- 동물과 인간]서울대 입구 봉천사거리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며 차안에 앉아 있노라면 길 건너 지하철 입구에서 건장한 여인 두어명이 지나가는 행인의 팔을 낚아채어 붉은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큰 버스로 밀어붙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매일같이 그곳을 바라보지만 적십자버스를 발견하고 제 발로 걸어와 헌혈하는 사람을 본 적은 아직 한번도 없다. 우리 나라의 경우 군부대 같은 곳에서 거의 강제로 피를 뽑지 않는 한 충분한 혈액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한다.

자연계에서 헌혈의 은혜를 베풀 줄 아는 거의 유일한 동물은 놀랍게도 그 끔찍한 흡혈박쥐들이다. 스토커의 소설 「드라큐라」에서 밤마다 남의 목을 물어 피를 빨아먹는 바로 그 동물 말이다. 지구상에 사는 대부분의 박쥐들이 모두 과일이나 곤충을 먹고 사는 반면 흡혈박쥐들은 실제로 열대지방에 사는 큰 짐승들의 피를 주식으로 살아간다. 그렇지만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목 정맥을 뚫어 철철 쏟아져 나오는 피를 들이마시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잠을 자고 있는 동물의 목 부위를 발톱으로 긁어 상처를 낸 후 그곳에 스며 나오는 피를 혀로 핥아먹는 정도일 뿐이다.

박쥐는 신진대사가 유난히 활발한 동물이다. 흡혈박쥐도 예외가 아니라서 하루 이틀 피식사를 하지 못하면 기진맥진하여 죽고 만다. 밤이면 밤마다 피를 빨 수 있는 큰 동물들이 언제나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닌지라 상당수의 박쥐들이 굶주린 배를 안고 귀가한다. 그러다 보니 이들 흡혈박쥐 사회에서는 피를 배불리 먹고 돌아온 배고픈 동료들에게 피를 나눠주는 「헌혈」풍습이 생겼다.

동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피를 게워내고 받아먹는 흡혈박쥐의 행동을 관찰하며 광견병 바이러스가 들끓는 피세례를 얼굴 가득 받곤 했던 어느 동물 행동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흡혈박쥐들은 대체로 자기 가족이나 친척끼리 피를 주고받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또 친척이 아니더라도 가까이 매달려 있는 이웃들에게 종종 피를 나눠주기도 한다. 피를 빨아먹은 박쥐는 그 고마움을 기억하고 훗날 은혜를 갚을 줄 알기 때문에 이 진기한 풍습이 유지된다.

헌혈이 다른 자선행위보다 특별히 어려운 까닭이 단순히 주사바늘에 대한 공포심만은 아닐 것이다. 내 몸의 일부인 피가 누구를 위해 쓰여지는 지도 모르며 선뜻 내놓기란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대학시절 위독하신 친구 어머니를 위해 단숨에 두 병의 피를 뽑게 하곤 며칠 앓아 누웠던 일 외에는 길에서 자진하여 헌혈을 해본 경험은 없는 것 같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가 헌혈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자신이 피를 내줄만큼 헌신적인 사람임을 남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집단 헌혈이 그런 대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사회는 언제나 남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헌신적인 사람들을 선호한다. 그래서 우리는 은근히 자기가 헌혈을 했다는 사실을 남에게 알리고 싶어한다. 헌혈을 했다는 표식으로 가슴에 달 수 있는 표식으로 가슴에 달 수 있는 메달이나 자동차에 붙이는 스티커를 나눠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최재천 교수 서울대 생물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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