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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회고록] 前-現대통령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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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회고록] 前-現대통령 평가

입력
1999.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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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는 이 회고록에서 역대 대통령 전원에 대해 대단히 인색한 평가를 내렸다.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은 부패정치의 원조로, 최규하(崔圭夏)전대통령은 역사의식이 없는 인물로,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은 권력욕의 화신, 또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은 태생적 한계를 극복못한 지도자로 묘사했다.특히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가장 가혹하게 평가절하해 주목을 끈다.

▲박정희 전대통령 육여사가 죽은 1년 뒤 나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대통령 오래 할 생각 없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쿠데타 직후 국민에게 번의를 거듭하며 흘린 눈물과 일맥상통했다. 18년 동안 부정부패로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을 조성했다.

▲최규하 전대통령 군사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전환시킬 결정적 시점에서 역사와 민심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다. 헛된 욕심과 좁은 시야에 갇혀 민주화를 지연시켰다.

▲전두환 전대통령 박정희의 품에서 성장한 그들은 박정희에게서 탐욕스러운 권력욕만 배웠을 뿐 파멸의 교훈은 배우지 못하고 역사를 과거로 되돌려 놓았다. 박정희보다 더 치졸했고, 정치 지도자로서도 솔직하지 못했다.

▲노태우 전대통령 전두환의 후신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취약한 정치력은 여소야대 정국과 겹치면서 정국운영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항시 정보정치를 통해 나에 대한 견제에 골몰했다. 출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 80년엔 민주화의 전열을 약화시킴으써 국민에게도, 자신에게도 불행을 초래했다.

그로 인해 야당의 힘이 분산돼 결과적으로 전두환의 쿠데타를 막지 못했다. 87년에는 지역감정을 선거의 기본전략으로 삼겠다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발상을 했고, 신당 창당으로 뒤통수를 쳤다.

■[YS회고록] 퇴임직후 곧바로 회고록 집필

○…김전대통령은 알려진 것과 달리 퇴임직후 곧바로 회고록 집필을 시작했다고 상도동의 측근이 전했다. 주로 기억에 의존해 구술하고, 비서진이 받아 적는 방식이었다. 당시 신문보도나 국회속기록 등 관련 자료들을 보완, 정리하는 일은 통치사료비서관을 지낸 윤무한(尹武漢)씨가 맡았다.

3,600여장의 분량의 원고가 완성된 것은 10월. 김전대통령은 출판사 교열과정에서 토씨하나까지 직접 고치는 등 정성을 쏟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전대통령은 또 이 회고록의 후속편으로 대통령 취임이후에 대한 집필도 이미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서전에서 김전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은 이는 정승화(鄭昇和)씨. 전국구 1번을 사양한 그를 『귀감이 돼야할 것』이라고 표현했다.

83년 단식때 17일 동안 치료를 거부하다 병실을 찾은 김수환(金壽煥)추기경으로부터 『생명은 소중하다』는 기도를 듣고 링거를 맞기 시작했다고 기술, 김추기경에 대한 각별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또 고비마다 자신을 지지했던 윤보선(尹潽善)전대통령에게 고마움을 표시했고, 김윤환(金潤煥)의원은 노전대통령과 갈등을 빚을 때 주례회동을 아이디어로 내놓았다고 썼다. 특히 김동영(金東英)씨가 타계하기 사흘전 병원에 찾아가 통곡했다고 고백했다.

김전대통령은 이밖에 김재규(金載圭)씨가 79년 총재 제명 전날밤 자신을 회유하려 했고, 민정당 권익현(權翊鉉)사무총장은 83년 단식때 「해외로 나가라」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뜻을 전해왔다는 등의 「비화(秘話)」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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