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집을 짓는 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다. 시나리오작가의 설계도에 따라 직접 집을 짓는 목수가 감독이라면, 돈을 대고 자재를 조달하는 실질적인 집주인은 제작자다.감독이 근사한 집을 꿈꾼다면 제작자는 잘 팔릴 집을 선호한다. 제작자는 때로 감독이 자신만의 창의성에 매몰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설계도대로 따를 수 없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영화의 성공은 바로 이들의 팀워크에 달려있다.
명필름의 심재명(36)이사는 집장사를 잘하는 제작자로 유명하다. 「투캅스」의 강우석(시네마 서비스),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차승재(우노필름)대표와 함께 영화판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영화제작자가 바로 심이사다. 투자자 사이에서 『심재명이 만든다면 투자할 만하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그의 성공작 리스트. 11일 개봉한 「해피엔드」는 벌써 42만명의 관객을 동원, 현재 최고의 좌석점유율(80%)을 기록하고 있다. 97년의 화제작 「접속」은 전국에서 148만명이 관람, 수익을 10억원씩 투자사와 나눠가졌다.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신인감독·조명·편집·각색·신인여우상, 청룡영화상에서 최고흥행 신인여우상등을 휩쓸었다.
98년 「조용한 가족」은 70만명. 「코르셋」의 이혜은, 「조용한 가족」의 고호경을 발굴한 것도, 전도연에게 영화배우의 생명을 불어넣은 것도 명필름의 솜씨다.
『성공비결이요? 하지만 개봉하기 전에는 늘 불안하기만 한 걸요』 그렇다. 「접속」을 올릴 때도 성공을 확신하지 못했다. 코미디, 액션물이 한창이었을 때. 『뜬금없이 멜로?』하는 반응이었다. 심이사는 「흥행불패」 한석규카드로 버팀목을 대고 통신인구를 믿기로 했다. 정작 네티즌의 반응이 폭발적이자 당황스럽기조차 했다. 『반응이 좋은 것만 좇다보면 아류작에 머무르기 쉬워요. 크게 성공하려면 위험하지만 새로운 장르, 새로운 소재를 개척해야 하죠』
심이사의 영화만들기는 불확실함에서 출발한다. 외화 「매트릭스」를 보고 상상력에 기가 질렸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진부한 소재를 포장한 스타일에 놀랐다. 『나라면 절대 못 만든다』며 새삼스레 영화 만드는 이들을 존경한다. 영화에 대한 경외가 샘솟으면 그는 다시 집을 한채 지으러 나선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영화는 따로 있다』면서. 이러한 든든한 배포, 좌절이 오히려 어려운 뱃심이 그의 자산이다.
그는 87년 동덕여대 국문과 졸업 이듬해 서울극장 외화홍보담당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극장에 걸리는 영화의 광고 문구를 쓰고 언론에 보도자료를 돌리는, 기획실의 밑바닥 일이 시작이었다.
극동스크린 기획실장을 거쳐 92년 명기획, 95년 제작사 명필름을 만들었다. 명필름에서 심이사는 남편(영화감독 이인), 동생과 기획 마케팅 제작역할을 번갈아 맡는다. 굳이 나눠보면 기획은 영화감독과 함께 아이템결정부터 시나리오발굴, 캐스팅등 제작 전반을 총괄하며 마케팅은 광고 홍보 프로모션을 맡는다. 기획과 제작의 차이는 돈줄을 대느냐 하는 것.
제작사를 차리고 첫 작품 「코르셋」을 만들면서 심이사는 5억원정도의 빚을 짊어진 때도 있었다. 『돈문제보다 더 어려운 것은 사실 정체성의 불안이었어요. 사회생활 초기 영화기획자라는 상(像)이 없을 때 「과연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무얼 해야 할까」하는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관심있는 일을 꾸준히 하다보니 여기까지 온 거죠. 영화일이란 한 두달 안에 승부를 내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들은 특히 느긋한 뱃심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의 좌우명]
형그리정신으로 일한다 대학 다닐 때부터 나는 내 손으로 학비를 벌었다. 성년이 됐으니 나는 내가 책임진다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나에게 「일」이란 자아실현이기에 앞서 나 자신을 책임지는 수단으로서 의미가 1차적이다. 이 것이 헝그리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에서 출발할 때 오히려 현실성을 잃지 않고 매사에 성실하게 된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직업 가이드] 영화기획·제작자
대학의 정규과정에는 영화기획·마케팅분야가 따로 없고 문예진흥원이 운영하는 영화아카데미등에서 일부 운영중이다. 지금까지 영화기획자가 되는 길은 영화사 기획실이나 제작부의 맨 밑바닥 일, 즉 촬영현장에서 커피를 나르고 소품 관리하고 일정조정하는 것부터 시작해 영화제작의 전 과정을 파악하고 기획자가 되는 길이 대부분이다.
영화제작자는 영화에 대한 감각과 관심, 영화를 볼 줄 아는 식견이 기본 자질. 취향을 넘어 작품에 대한 장점과 한계를 갈라 볼 줄 알아야 한다.
또 문학, 영상, 음악을 아우르는 장르이다 보니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필요하다. 창의적 감각 외에 영화를 산업적으로 볼 수 있는 비즈니스안목과 사람에 대한 장악력도 필수적이다.
바쁠 때에는 밤새는 일도 허다한 반면 사무조직과 보수적 규율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누구나 역량을 발휘할 여지가 많다는 것이 여성에게 이점이다.
현재 영화 홍보인력은 약 90%가 여성이며 활발하게 영화를 만들고 있는 제작사 중 3-4명의 여성책임자가 포함돼 있다. 여성의 파워가 급신장하고 있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