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되돌아본 한국경제 100년, 지난 20세기 한국경제를 대표하는 구호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로 경제주권을 잃은 상태에서 20세기를 맞이했던 우리 경제는 「잘살아 보자」는 이 한마디로 고속 성장의 발판을 닦았고, 때로 몸살을 앓고 비틀거리다가 다시 가다듬고 일어서 번영의 새 밀레니엄을 내다보고 있다. 구호품 옥수수죽을 먹고 성장해 이제는 첨단기술로 무장한 인터넷 정보통신 대국을 꿈꾸는 경제대국으로 당당히 올라섰다.
한국경제는 1900년대 초기 반세기동안 일제치하의 수탈위주 경제에서 해방 후 6·25동란 등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했으나 60년대이후 중화학공업 위주의 경제개발과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에 매진해온 결과 절대빈곤(최빈국)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53년 67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이 96년 1만달러를 넘어섰고 선진국친목단체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했다. 농업중심의 생산구조는 3차산업으로 탈바꿈했으며 48년 2억3,000만달러에 그쳤던 교역규모는 올해 3,000억달러를 넘어섰다.
하지만 차입위주의 기업경영과 낙후된 금융구조 등으로 외환위기에 몰려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으며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가 사라지고 혹독한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회복하고 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한강철교 준공과 농지개혁에서부터 최근의 IMF구제금융과 벤처열풍까지 한국경제의 지난 100년을 테마별로 점검해본다.
▥경부고속도로 개통(70.7)
67년부터 추진된 경부고속도로건설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르는 428km 4차선 도로로 계획됐다. 공사비 300억원에 2년8개월의 단기간 공사끝에 70년7월 전구간이 완공됐다. 토목공사규모와 교량·터널 등 각종 구조물 측면에서 해방 이후 최대 공사로 평가됐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자동차시대의 개막, 1일생활권시대의 실현, 경제개발 촉진 등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대도시 집중가속화등 부작용도 초래했다.
▥포항종합제철 건설(73.7)
68년 설립된 국내 최대규모의 철강제조업체인 포항종합제철은 대일 청구권자금 3,100만달러와 일본차관 9,400만달러로 70년4월 1일 영일만 개펄을 매워 제철소 공사를 시작, 73년7월 용광로와 하부공정 등 제철소 1기를 준공했다. 철강생산 자주화로 제2차 산업기반을 확보해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원동력구실을 한 포항제철은 중국경제지도자들도 탐내는 「한국의 대표적 성장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경부철도 완공(1904.11)과 고속철도
일본은 1901년 8월 착공한 서울~부산 간 경부선 철도는 1904년 11월10일 완공됐으며 이듬해 남대문 정차장 구내에서 개통식을 가졌다. 이후 경부선철도는 한반도 철도망의 중추역할을 했으며 80년대 초부터는 서울~부산을 2시간 안에 주파하는 경부고속철도건설사업이 검토되기 시작해 92년 본격 공사에 착공, 현재 일부구간에 시험운행중이다.
▥농지개혁(50.4)
농지개혁은 1949년 6월21일 관련법이 통과된 후 수많은 우여곡절과 미묘한 정세 속에서 추진, 1950년 시행령이 공포됐다. 지주계급 소유의 소작지를 자작지로 바꾸는 작업을 통해 생겨난 자작농은 60~70년대 경제발전의 탄탄한 밑거름이 됐다. 정부는 지주들에게 줄 보상금으로 현금 대신 귀속재산을 우선 구입할 수 있는 지가증권을 발행했고 헐값이 된 지가증권을 대량으로 사들인 사람들은 새로운 자본가계층으로 성장해 한국경제의 공업화를 이끌게 된다.
▥1·2차 통화개혁(53,62) 53년의 제1차 통화개혁은 격심한 인플레이션을 수습해 경제안정을 도모하려는 데서 타당성이 인정됐으나 그 효과면에서는 국회의 예금 봉쇄조치 완화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62년 2차 통화개혁은 비교적 안정기조를 지속한 경제상황에서 인플레이션 수습이 아닌 장기산업재원조달을 위해 감행됐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유통경색과 기업가동률 저하 등의 부작용만 초래했다.
▥경제개발 5개년 개획(60~70년대)과 새마을운동
「잘살아 보자」는 기치아래 추진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오늘날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키우는 모태가 됐으며 한편으로 우리 경제의 구조적 특징을 결정짓는 계기가 됐다. 이 기간 중 1인당 GNP는 60년 82.6달러에서 66년에는 126달러로 증가했고 3,000만~4,000만달러에 불과하던 상품수출이 66년에는 2억 1,900만달러로 늘어났다. 또 새마을 운동을 통해 식량자급에 성공했으며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새마을 정신은 의식을 개혁한 정신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수입자유화(78.5)
정부는 국내산업의 경쟁력강화와 물가안정, 품질경쟁에 의한 소비자보호 등을 위해 78년 5월11일 제1차 수입자유화조치를 내렸다. 이 조치로 수입자유화율은 53.8%에서 60.7%로 높아졌다. 또 79년부터 82년까지 수입자유화품목 대상을 점진적으로 확대했다. 85년 이후 국제수지의 흑자전환, 한미간 통상마찰 등에 따라 수입자유화율은 더욱 커졌으며 93년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이후 국내 시장은 농산물을 포함해 완전 자유화했다.
▥금융실명제 실시(93.8)
당시 김영삼대통령은 금융거래의 정상화를 기하고 과세형평을 통한 경제정의를 실현을 위해 긴급개정경제명령에 따라 93년 8월12일 오후 8시부터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키로 했다. 이자·배당소득에 대한 종합과세는 96년1월부터 단계적으로 실시하며 주식양도차기엥 대해서는 과세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금융소득종합과세는 96년 한해 실시된 후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97년말 유보됐으며 99년8월에 2001년부터 부활키로 결정했다.
▥1,2차 오일쇼크(73,79)
73년 10월6일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은 세계적으로 원유수급의 차질과 원유값 급등을 불러와 국내에서도 제1차 오일쇼크를 겪었다. 해외의존적 경제구조를 갖고 있던 우리나라도 수출증가세가 꺾이고 원자재값이 폭등하면서 국제수지가 악화됐다. 물가가 폭등하고 공장가동이 멈추는 등 국가경제 전체가 휘청였다. 이어 79년 이란사태등으로 또한차례의 오일쇼크가 찾아왔다. 국내 석유류 가격이 한꺼번에 40%이상 폭등했으며 80년 우리경제는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3저호황(86~88)
86년부터 88년까지 우리나라는 「저금리, 저달러(엔고), 저유가」라는 이른바 「3저(低)호황」을 맞이했다. 이같은 외생적 변수에 따라 86년 이후 국제수지가 흑자로 반전되고 연간 10%이상의 성장을 달성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3저호황에도 불구하고 이를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등에 활용하지 못해 국제경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OECD가입(96.11)
문민정부는 신경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OECD가입을 역점사업으로 추진했고 96년11월 선진국의 사교클럽이라고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에 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야당 등에서는 가입에 따른 후진국지원 및 외환출자 등 의무사항이 많은 점을 들어 시기상조론을 제기했으며 97년 환란을 겪으면서 정부가 너무 서둘러 OECD에 가입, 외환위기를 겪는 한 원인이 됐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IMF체제(97.12)
97년 대기업 연쇄부도와 동남아 통화위기 속에 국내 금융기관들의 해외차입이 어려워지면서 외환보유고가 고갈돼 사실상 국가부도위기에 처하자 정부는 11월21일 IMF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고 12월3일 캉드쉬 IMF총재와 임창열 경제부총리는 구제금융 지원을 위한 이행각서에 서명, 한국은 경제신탁통치로 불리는 IMF체제에 돌입했다. 총지원 규모는 IMF를 비롯한 국제기구가 350억달러, 미국·일본 등 선진국이 233억달러였으며 한국은 지원조건으로 재정및 금융의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및 기업 구조조정을 요구를 수용했다.
▥대기업 연쇄부도사태(97)
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도산을 시작으로 대기업 연쇄부도사태가 이어졌다. 4월 삼미그룹이 부도를 낸데 이어 진로그룹이 부도유예를 신청했고 5월 대농·한신공영에 이어 7월 기아사태가 터졌다. 쌍방울그룹과 해태가 화의를 신청했고 12월에는 고려증권과 한라그룹이 차례로 쓰러졌다. 97년 한해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은 30조원을 넘어 신용경색과 금융불안을 초래했다.
▥ 대우그룹 해체(99)
대우의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으로 김우중의 「대우신화」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대우그룹이 계열사별로 분리됐다. IMF사태 속에서 다른 대기업과는 달리 확장경영을 통한 위기돌파를 시도하던 대우는 수차례에 걸쳐 구조조정계획과 재무구조개선 등을 제시했으나 계속되는 자금난을 견디다 못해 채권단의 신규자금지원과 함께채권단 주도의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됐다. 그 결과 ㈜대우 등 12개계열사가채권단의 출자전환과 채무조정을 통한 회생과 해외매각 등을 모색하게 됐고 김우중 회장은 모든 경영권을 포기했다.
김호섭기자
dream@hk.co.kr
■[20세기 대표기업인들] 정주영.이병철.유일한등
20세기 한국경제는 「재벌의 시대」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각종 경제단체와 기업연구소 등에서 뽑은 20세기 최고의 경영인에는 역시 정주영(鄭周永·85)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위로 꼽혔다. 19살에 집을 나와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46년과 50년에 세운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건설을 초석으로 국내 정상의 대기업, 현대그룹을 일군 정 명예회장의 스토리는 지난 100년 한국경제를 상징하는 「신화」로 통한다. 한때 대통령선거에까지 출마했던 그의 인기는 세기말까지 계속돼 소떼 방북과 금강산관광 통일농구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삼성그룹의 창업주 고 이병철(李秉喆)회장과 이건희(李健熙)회장도 「관리경영」과 「인재육성」으로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병철 회장은 38년 당시 3만원으로 그룹 모체인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61년 전경련 창업을 주도했다. 이건희회장은 87년 회장 취임 이후 전자와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 경영역량을 집중, 한국의 차세대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유한양행을 창업한 유일한(柳一韓) 창업주가 존경받는 기업인의 선두그룹에 들었다. 1926년 「버들표 유한양행」을 창립해 62년에는 국내기업 최초로 주식상장을 했으며, 모범납세와 전재산의 사회환원 등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모델로 자리잡았다. 고 최종현(崔鍾賢)SK그룹회장과 박태준(朴泰俊)전 포철회장 등도 20세기 한국경제를 대표하는 기업인 대열에 들었다.
90년대 벤처열풍을 반영하듯 한글과컴퓨터를 창업한 이찬진(李燦振)씨와 컴퓨터바이러스 백신 전문가인 안철수(安哲秀)씨 등 벤처경영인들도 두각을 나타냈다. 경제전문가들은 『21세기에는 미국의 빌게이츠처럼 한국에서도 벤처경영인이 한국경제를 대표하는 기업가가 될 것 』이라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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