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문화의 결정판이라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틀리지 않다. 비단 문화에 한정할 것 없이 신문이나 잡지, 방송처럼 출판은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체」로서 중요한 기능을 갖는다. 그래서 잘 팔린 책은 그 사회의 모습, 사회 구성원의 관심사를 짐작케 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20세기의 마지막 1999년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올해 인기 좋게 팔려나간 책을 통해 한국의 현실을 되돌아본다. 한국일보는 인기와 화제를 한 몸에 안았던 5권의 책을 골랐다. 이 책들이 물론 양서(良書)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어떤 사회와 문화 가운데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는 충분하다.
■유교를 뒤엎어라 「공자가 죽어야」
상명대 중문과 김경일 교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바다출판사 발행)는 파격적인 제목에, 신랄한 한국의 유교문화 비판으로 일년 내내 화제를 모았다. 갑골문 등 정통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학자가 전통문화를 지탱하고 있는 유교에 메스를 들고 정면 승부한 것부터가 눈길 끌기 충분한 데다 문체마
저 「용감」했기 때문이다. 『학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언제나 끼리끼리 만나, 자리를 나누고 등록금과 학술보조비 따위를 나눠먹으며 히히덕거리지만, 돌아서기가 무섭게 서로를 물고 뜯고 비방하는 저열한 인간들이다』.
김 교수는 책에서 유교는 출발부터 잘못이라고 봤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기원전 14세기 조갑이라는 모사가(謀事家)의 정권 옹호에 눈감고 주나라를 이상 사회로 내세운 공자는 왜곡된 가치관을 퍼뜨리는 위험인물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그는 한국인들이 하루빨리 유교문화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가 요구하는 비판적인 태도, 상상력을 길러야 한다는 주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유림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법정 소송으로 이어졌다. 김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몇 권의 책도 출간되었다. 21세기를 맞는 한국사회가 전통과 현대의 극심한 갈등을 아직도 원만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또렷이 보여주었다.
■마음 가는 대로 쓰는 나의 性_서갑숙
올해 우리 사회를 가장 떠들썩하게 만든 책 한 권을 들라면 많은 사람들이「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j-pub 발행)를 꼽을 것이다. 충청도의 한 시골 서점 주인은 이 책 400권을 팔고 『책방 문 열고 가장 많은 책을 팔았다』고 말했을 정도니까.
얼굴이 잘 알려진 탤런트가 강간과 동성애 체험을 적고, 사랑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시험하기 위해 친구와 함께 한 남자와 성교한 이야기를 썼다는 것은 범상한 일은 아니다. 책에는 이 밖에도 심장판막증으로 죽음의 그늘에 묻혀있었던 젊은 시절,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빚더미에 앉았던 일, 행복하게 출발했지만 이혼하고 만 사연 등 서갑숙씨의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름 낯선 한 여성이 이런 이야기를 담아 책을 냈다면 이만큼 주목받을 수 있었을까? 그의 인생이 고달펐다면 모진 팔자라고 혀나 끌끌 찼을 테고, 성체험이 적나라했다면 3류 논픽션으로 알고 지나쳤을 것이다. 이 책의 인기는 한국사회에서 성담론이 유포, 확산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책을 낸 배경을 떠나 서씨의 책은 우리 사회가 성문제에 얼마나 민감한 지, 또 음란한 엿보기가 얼마나 널리 퍼져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일본인의 한국 엿보기 「맞아죽을 각오를」
『한국사람들은 법치국가 하겠다는 마음이 없어요』. 와세다(早稻田)대를 나오고 일본 정계와 경제계를 두루 거치며 한국에서 26년 산 노년의 이케하라 마모루(池原衡)씨가 낸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중앙M&B)은 올해 상반기 가장 인기가 좋았던 책이다.
한국인이 일본을 비판하거나, 일본인이 한국을 비판하는 책은 쉽게 눈길을 끈다. 아직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두 나라 사람의 감정의 골 때문이다. 하지만 책이 많이 팔리는 데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글쓴 이의 지명도도 있어야겠고, 무엇보다 책의 내용이 고개를 끄덕일만 해야 한다.
「한국사람들은 너무 빨리 흥분하고 너무 쉽게 실망하며 모든 것을 너무 빨리 잊는다, 한국사람들의 질서의식은 제로에 가깝다, 한국사람들은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다, 한국에는 「자기 돈 가지고 사업하면 바보」라는 말이 통한다」. 그의 글은 어떤 대목에서는 사태를 넓게 보지 못한 편협함도 있지만 한국인들의 그릇된 모습을 대체로 올바르게 지적했다. 많은 한국사람들이 일본인의 이런 지적에 공감했다. 한국이 일본과의 구원(舊怨)을 벗고 있다는 점을 이 책의 성공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를 갈수록 진지하게 생각하는 한국인의 세계화 의식이다. 최근 나온 「일본여자가 본 한국여자」(현대문학 발행)도 비슷한 책이다.
■황지우가 그려낸 중년의 고독
「중년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실험성 짙고, 정치와 세태를 풍자한 시로 주목받아온 황지우씨의 새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발행)는 참으로 오랜만에 시집을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르게했다. 책이 나온 것은 지난해 12월 말. 해를 넘기면서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주로 마흔을 전후한 중년 남자들이 서가를 기웃거렸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중년의 일상과 그 일상의 권태를 회한과 자기반성의 언어로, 때론 냉소적인 시어로 다듬어 낸 시인의 솜씨도 솜씨지만, 이 시집은 무엇보다 시원스럽게 한 잔 들이킬 「문화」에 목말라하던 중년의 가슴을 헤집고 들어갔다. 그들보다 조금 젊은 사람들은 「386세대」라는 훈장을 달고 축하 받았지만 40을 넘어 기성사회에서 자로 잰 듯 살아가는 중년에게는 돌아오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을 달래주는 문화도 없었던 셈이다. 이 책은 문화소외 계층이었던 한국의 중년 남성을 양지로 끌어냈다. 정호승씨의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발행)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시대를 준비하라_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사 회장 빌 게이츠의 「빌 게이츠@생각의 속도」(청림출판 발행)는 정보화 사회의 변화를 내다보는 책이다. 디지털 시대를 위한 책이 이틀에 한 권 꼴로 쏟아져 나오지만 이 책이 잘 팔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디지털 기술과 조직 운영으로 정면 승부하는 기업은 물론이고 개인들까지도 읽어 이해하는데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정보화의 지형도를 가늠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빌 게이츠는 디지털 조직을 신경망에 비유한다. 신경망처럼 퍼진 디지털의 발전속도와 전달속도가 바로 경쟁력이다. 그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보관리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인터넷이 만들어낸 새로운 상거래 원칙들, 전략적 사고를 통한 지식의 장악도 디지털 시대에 성공하기 위한 관건이다.
그러기 위해서 게이츠는 『지금 바로 기업들이 디지털 신경망 구축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사람들이 어디로 똑같이 눈을 돌리고 서 있는지를 이 책의 성공을 통해 감지할 수 있다.
-올해 잘 팔린 좋은 책 분야별 5선-
■국내 소설·시
너무도 쓸쓸한 당신(박완서 지음, 창작과비평사)
기차는 7시에 떠나네(신경숙, 문학과지성사)
내 생에 꼭 하루 뿐일 특별한 날(전경린, 문학동네)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황지우, 문학과지성사)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정호승, 열림원)
■외국 소설
아버지들의 아버지(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열린책들)
일식(히라노 게이치로, 문학동네)
스푸트니크의 연인(무라카미 하루키, 자유문학사)
철도원(아사다 지로, 문학동네)
부서진 사월(이스마엘 카다레, 문학동네)
■에세이
오체불만족(오토다케 히로타다 지음, 창해)
풍경(원성 스님, 이레)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서진규, 북하우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홍세화, 한겨레신문사)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류시화, 열림원)
■경제·경영
빌 게이츠@생각의 속도(빌 게이츠 지음, 청림출판)
제3의 길(앤서니 기든스, 생각의나무)
지식의 지배(레스터 서로, 생각의나무)
클릭 미래 속으로(페이스 팝콘 등, 21세기북스)
낯선 곳에서의 아침(구본형, 생각의나무)
■인문
두브로브니크는 그날도 눈부셨다(권삼윤 지음, 효형출판)
호모 에티쿠스_윤리적 인간의 탄생(김상봉, 한길사)
역사의 길목에 선 31인의 선택(역사학자 18명, 푸른역사)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이덕일·이희근, 김영사)
몰입의 즐거움(미하이 칙센트미하이, 해냄)
■과학
개미제국의 발견(최재천 지음, 사이언스북스)
화성에서 온 수학자(브루스 쉐흐트, 지호)
과학사 X파일(최성우, 사이언스북스)
수학이 수군수군, 물리가 물렁물렁, 화학이 화끈화끈(샤르탄 포스키트 등, 김영사)
셜록 홈즈의 과학 미스테리(콜린 브루스, 까치)
■실용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정찬용 지음, 사회평론)
성공하는 10대들의 7가지 습관(숀 코비, 김영사)
증권투자 알고 합시다(매일경제 증권부, 매일경제신문사)
인터넷 무작정 따라하기(유해룡, 길벗)
두 번만 읽으면 끝나는 영문법(배진용, 도솔)
*교보문고, 영풍문고, 종로서적 연간 판매량에 바탕해 한국일보 선정.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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