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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한국스포츠20대사건](18)2002년 월드컵축구 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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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한국스포츠20대사건](18)2002년 월드컵축구 유치

입력
1999.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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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축구대회의 한·일 공동개최는 그 의미와 중요성에서 88서울올림픽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시설과 행정에서 낙후를 면치 못한 한국축구는 7개의 대규모 전용구장을 갖게 되며 세계에서 14번째로 월드컵을 개최한 축구강국으로 도약한다. 또 경기장과 숙박시설, 도로건설 등으로 생산유발효과는 5조원에 달하고, 순수흑자는 5,000억원으로 경제효과 또한 엄청나다. 전세계적으로 올림픽보다 많은 연인원 320억명이 대회를 시청하고 10만명의 관광객이 한국을 찾아와 무형적인 광고효과 또한 올림픽을 훨씬 뛰어 넘는다.

무엇보다 값진 역사적 의미는 월드컵사상 처음으로 두 나라가 공동개최함으로써 불신과 반목의 한·일관계는 새로운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발전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또 월드컵유치전에 일본보다 3년 늦게 뛰어 든 후발주자 한국은 국민의 에너지를 한 곳에 결집시켜 「승리와도 같은」 공동유치를 이끌어낸 것도 유치과정의 값진 성과다. 그러나 월드컵유치의 첫 걸음은 참으로 싱겁게 시작됐고 그래서 더욱 극적인 감동이 있었다.

93년 10월, 94아시아최종예선이 벌어진 카타르 도하. 한국기자단 숙소를 방문한 정회장은 대화중 문뜩 『경기장에서 「2002 Worldcup in Japan」이라고 쓴 보드를 보았다』며 『우리가 월드컵본선에 진출하면 월드컵을 유치하겠다』는 말을 했다. 월드컵유치에 관한 생각을 처음 밝힌 것인데 그때 이 말을 진심으로 믿었던 기자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에 패하고 마지막에 이라크가 일본과 비겨 우여곡절끝에 본선진출이 확정된 28일 정회장은 기자회견서 월드컵유치를 공식 선언했다.

이미 3년전부터 유치활동을 시작한 일본을 상대로 정회장의 대역전극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12월15일 이홍구씨의 월드컵유치위원장 추대에 이어 94년 1월 발기대회…. 그리고 정회장은 이해 5월 일본축구협회 무라타부회장을 제치고 아시아축구연맹(AFC) 파견 국제축구연맹(FIFA)부회장(집행위원) 선거에 당선됨으로써 유치전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정회장은 이때부터 월드컵유치까지 지구를 38바퀴나 돌며 전세계 축구계를 상대로 유치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2년뒤인 96년 5월10일. 한달간의 외국유치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정회장은 이날 처음으로 월드컵유치 가능성에 긍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일본을 지지해온 주앙 아벨란제 FIFA회장과 그의 독선에 반발하는 레나르트 요한손회장이 이끄는 개혁파의 대립으로 한국이 유리해졌다는 것이었다.

이어 94년 중반부터 간간이 터져 나온 한·일공동개최론이 다시 거세게 일었고 요한손회장과 아벨란제회장의 대타협설이 나왔다. 마침내 5월31일 FIFA집행위원회는 안건 상정 30분만에 양국의 공동개최를 확정짓는다. 6월1일자 한국일보는 월드컵 유치소식을 11개면에 걸쳐 상세히 보도했다. 한국스포츠사상 단일 사건으로 이렇게 많은 신문지면을 장식한 적은 없었다. 공동개최에 대해 당시 한국일보는 「한·일 상처 덜주기, 세기의 仲裁」로 평가했다.

유승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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