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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족이야기] 차별심한 일본에서 버팀목이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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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족이야기] 차별심한 일본에서 버팀목이던 어머니

입력
1999.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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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하루를 쉬면 내가 알고, 이틀을 쉬면 감독이 알고, 사흘을 쉬면 관객이 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발레가 겉보기의 화려함과 달리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힘든 일이라는 뜻이다.내가 바로 그런 발레계에 들어와 오늘에 이르기까지에는 어머니(김명림·66)의 보살핌이 절대적이었다. 어머니 특유의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은 나의 삶을 이끌어 주었다.

어머니는 한마디로 「여걸」이다.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정치인이나 장군이 되어 크게 성공했으리라. 사람을 휘어잡는 리더십이 있고 포용력과 책임감이 뚜렷해서 한번 만나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분이다. 어머니가 해낸 일은 지금도 우리 집안의 「전설」로 남아있다.

어머니는 재일교포 2세로 일본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어렵게 성장했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흔히 있는 「입을 하나 줄이기 위해」 스무살이 채 되기 전에 조그마한 건설회사를 경영하던 지금의 아버지(최배병·71)에게 시집을 갔다.

이때부터 어머니의 전설이 시작된다. 어머니는 선진 사상을 접해서가 아니라 체질적으로 여자란 집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거부했다.

당시로서는 「금녀 지대」인 건설 현장에 뛰어들어 남자 노동자들을 지휘하며 공사 일을 독려했다. 현장의 인부들은 거칠고 다루기 어렵기로 유명한데 어머니 앞에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고양이앞의 쥐」가 됐다.

장정 못지않게 힘도 셌던 어머니는 때론 작업복차림으로 직접 벽돌을 나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일을 시키는 만큼 보수도 두둑히 주어서 신망을 얻었다.

어머니의 건설회사는 나날이 성장했고 우리 집은 부유해졌다. 막내인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 우리 집은 소도시 마이스루에서 유일하게 자가용을 갖고 있었고 어머니 역시 유일하게 운전 면허증을 가진 여성이었다. 어머니가 선글라스를 끼고 큼지막한 미제 포드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는 모습은 단연 화제였다.

어머니는 슬하의 3남매 교육에도 온몸을 던졌다. 어머니는 어디서 들었는지 「교육 효과」라는 말을 자주 되뇌었다. 아이 정서에 도움이 되고 지능을 발달시키는 것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 우리에게 갖다 주었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 무용, 피아노, 미술 등을 다양하게 접했다.

언니와 내가 발레를 배운 것도 어머니의 열성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여자가 발레를 하면 몸매가 예뻐지고 교양이 쌓이는 등 교육 효과가 높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교육 효과가 있다구?』 어머니 성격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당장 언니 손을 끌고 발레 학원에 등록하게 했다.

내가 발레를 처음 본 것도 초등학교 3학년때 언니를 따라 발레학원에 가서였다. 눈부시게 하얀 튀튀(짧은 스커트의 발레복)를 입고 토 슈즈로 바닥을 사뿐사뿐 날아다니는 언니 모습이라니…. 무용을 배우기는 했지만 발레는 또 다른 환상의 세계였다. 나는 어머니를 졸라 언니와 함께 발레 학원에 다니게됐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내가 발레하는 것을 마땅치 않아 했다. 발레하느라 공부를 소홀히 한다는 이유였다. 5학년때는 아예 학원비를 주지 않고 발레를 못하게 했는데 이미 발레에 미쳐있던 나는 저금통을 털어 몰래 학원에 다녔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더이상 말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마음을 고쳐 먹고 적극적으로 후원에 나섰다.

한번 팔을 걷어붙이면 확실히 해내는 어머니의 전설은 여기서도 꽃을 피우게 된다. 어머니는 나를 일본 수도 됴쿄(東京)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쉽게 말해 일본 최고의 발레 학원에 등록시켰다. 내가 사는 마이스루시와 발레 학원이 있는 도쿄까지는 왕복 12시간이 걸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보다 먼 거리다. 그래서 발레 수업이 있는 날이면 어머니는 아침 일찍 나를 차에 태우고 직접 운전해 도쿄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이런 장거리 출장수업은 중·고교 6년동안 계속됐지만 어머니는 한번도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대학을 마치고 나니 일본에서 발레를 더 배울 게 없을 것같아 고민했는데 어머니도 같은 생각을 했나보다. 어느 날 내게 『프랑스가 발레 선진국이라더라. 내가 알아볼테니 프랑스로 갈 준비를 해라』고 말했다.

프랑스에 도착해 어머니가 일러준 거처를 찾아가니 입이 벌어져 말이 안나왔다. 조금 과장하면 내가 살 곳은 「저택」이었다. 널찍한 방 3개에 최신식 샤워실과 온갖 가제도구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웬만한 프랑스 중산층 가정이 살만한 공간에 나 혼자 지내게 된 것이다. 1년반 동안의 프랑스 유학기간동안 나보다 나은 거처를 가진 동양인을 보지 못했다.

한동안 이웃 프랑스인들은 나의 정체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고 한다. 젊은 여자가 「저택」에 혼자 살면서 때론 훤히 비치는 옷을 입고 외출했으니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공부하려면 환경이 좋아야 하지 않겠니. 딴 생각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고 말했다.

사실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내게 편지를 보내왔고 한달에 한번은 프랑스로 건너와 직접 만든 김치를 가져다주는 어머니였으니까. 자유분방한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호기심을 가질 틈도 없었다.

어머니는 올해초에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나는 상 이름의 「장한」이라는 말이 어머니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장하다」에는 최선을 다해 어떤 일을 이룩했다는 의미가 있기때문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적극적인 성격에 내가 정신없이 끌려다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정말이지 어머니의 온 몸에서는 생의 에너지가 활활 뿜어 나온다. 어머니가 때론 강제적이어서 서운한 마음이 든 적도 있다. 하지만 당신의 행동에는 조건없는 사랑이 깔려있기에 미워할 수가 없다. 어머니는 헌신적이고 강한 한국 여인상, 바로 그 자체였다.

/국립발레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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