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로비사건은 올해 여권에겐 최대의 악재였다. 연초부터 시중에 떠돌던 소문이 5월말 언론에 보도되면서 곧바로 정치권의 최대 현안으로 부각됐다.사건자체는 신동아그룹 최순영(崔淳永)전회장측이 사법처리를 면하기위해 고관 부인들에게 고급 옷으로 로비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는 비교적 단순한 내용. 그러나 수습 과정에서 청와대 사직동팀 내사 및 검찰 수사의 축소·은폐 의혹, 국회 청문회에서 고관부인들의 거짓말 시리즈, 대통령의 부적절한 인책 타이밍 등 여권의 잇단 악수가 이어진데다, 무엇보다 IMF위기이후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던 민심과 맞물려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이로 인해 헌정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제까지 도입됐다.
결국 김태정 전법무부장관, 박주선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구속됐고 두 명의 전직장관 부인 등 옷로비관련 핵심 3인방이 위증혐의로 사법처리 직전에 놓여 있다. 여권은 이 사건의 파장이 내년 총선에까지 영향을 주게될 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올해 내내 공동여당간 최대 현안은 내각제와 합당문제였다. 자민련 김용환 전수석부총재등 내각제 강경파들은 줄기차게 『대선합의문대로 연내에 개헌을 하자』고 주장한 반면, 청와대와 국민회의는 소극적 반응을 보였다. 김종필 총리는 7월12일 김용환 강창희 의원등과 만나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며 사실상 연내 개헌을 포기했고, 같은 달 21일 김대중 대통령, 김총리, 박태준 자민련총재가 만나 내각제 연기를 공식 결정했다.
한편 김대통령은 7월17일 김총리와의 워커힐호텔 회동에서 합당을 제의했다. 김총리는 이 자리에서 『당 차원에서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유보적 반응을 보였고, 이어 9월 중순 『국가차원에서 생각할 것』이라며 합당 가능성을 분명하게 시사했다. 그러나 12월 김총리가 남미순방에 나선 뒤 급물살을 탄 합당론은 자민련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김대통령과 김총리가 12월22일 「합당하지 않는다」고 합의함으로써 합당정국은 일단 마무리됐다.
7월22일 전남 광양을 방문한 김대중대통령은 국민회의의 간판을 내리고 새 출발을 전격 선언했다. 여권 신당 창당의 신호탄이었다. 이는 곧이어 국민회의 이만섭(李萬燮)총재대행의 7·23 기자회견, 김대통령 8·15 경축사, 이대행의 8·18 「기득권 포기 선언」, 8·30 국민회의 중앙위 신당창당 선언으로 숨가쁘게 이어졌다.
김대통령이 내세운 신당 창당 명분은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전국정당화와 젊은 피와 전문가 수혈을 통한 정치권 인적 교체. 이 구상은 9월9일 비호남 출신 및 전문가가 주축을 이룬 신당 발기인 38명 발표로 구체화했고, 바로 이튿날 신당의 산파역을 맡게 될 신당창당추진위가 이만섭·장영신(張英信)공동대표 체제로 공식 출범했다. 10월10일엔 신당추진위가 1차 영입인사 25명의 면면을 국민앞에 공개했고 11월25일 2,500여명의 신당창당준비위가 발족했다.
신당은 내년 1월20일 국민회의를 흡수 통합하는 형식으로 탄생될 예정이다. 신당이 DJ의 16대 총선 승부수가 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4월7일 여당은 「세풍」사건의 핵심당사자인 한나라당 서상목(徐相穆)의원 체포동의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 표대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여당의 참패. 가 136 부 145표로 체포동의안은 부결됐다. 12명 이상의 여당 의원들이 반란표를 던진 결과였다.
이후 정국은 한바탕 요동을 쳤다. 우선 국민회의 지도부가 개편됐다. 31개월간 재임해 왔던 조세형(趙世衡)총재대행 체제가 막을 내리고 김영배(金令培)대행이 임명됐다. 국민회의 한화갑(韓和甲), 자민련 구천서(具天書)총무도 교체됐다. 여당이 쥐고있던 세풍 칼날이 급격히 무뎌지면서 오히려 야당이 4·3 재·보선 불법선거의혹을 고리삼아 역공에 나섰다. 정치개혁입법 등 여권의 정국 운영 구상이 큰 차질을 빚었음은 물론이다.
국민회의와 자민련 사이의 책임론 공방으로 여권 공조가 크게 흔들리기도 했다. DJT가 회동, 급히 봉합하긴 했지만 이를 계기로 김대통령이 2여 합당, 신당 창당을 굳게 결심하게 됐으리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6월3일 실시된 서울 송파갑 국회의원 재선거에 직접 출마하는 모험을 감행한 끝에 원내진입에 성공했다. 「정치초년병」으로 세풍, 총풍 등 벼랑끝위기를 힘겹게 헤쳐나온 이총재가 마침내 원네에 「교두보」를 마련한 것. 이총재는 이후 옷로비사건과 언론문건 파문 등 여권의 잇따른 실수를 놓치지 않고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함으로써 취약했던 당내 입지를 굳히고 대중정치인으로 거듭났다.
이총재는 김영삼 전대통령과의 「기싸움」에서도 「우세승」을 거둬 당 안팎에 저력을 과시했다. YS가 민주산악회 재건을 선언하며 당을 흔들자 이총재는 「3김청산론」이라는 정면승부수로 맞섰다. 결국 저돌적인 YS도 한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고, 저마다 목소리를 내던 당내 비주류중진들도 한껏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당 안팎에서는 『이총재가 여권의 실기에 따른 반사이익만 챙겨왔을 뿐, 스스로 정국을 이끌어 갈만한 정치력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평가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올해 정치권에서는 말로 화를 입은 경우가 유난히 많았다. 특히 당사자가 대부분 정권 실세들인데다, 공동여당간의 불협화음으로 발생한 것들도 많아 파문이 더욱 컸다.
3월 재벌개혁의 선봉장이던 국민회의 김원길 당시 정책위의장은 국민연금 확대실시 연기 발언으로 정책혼선을 일으킨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비슷한 시기 설훈 당시 기조위원장도 내각제 연기발언으로 물의를 빚어 낙마했다. 7월초에는 김영배 총재대행의 『총리는 총리이고 나는 나』발언으로 교체됐다.
지난달 이종찬 전국가정보원장은 언론문건 사건 와중에 국정원 문서유출 발언으로 「문건정국」에 기름을 부었다. 12월 들어선 천용택 국정원장이 김대중 대통령 정치자금수수 발언으로 낙마, 아직까지 여진을 남기고 있다. 성격은 다르나 진형구 대검공안부장의 취중발언에서 비롯된 파업유도사건은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히며 특검제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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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기 정국은 폭로공방 속에서 날이 지샜다. 폭로와 폭로가 끝없이 반복되면서 여야간 대화와 타협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가파른 대치만 이어졌다. 더구나 검증되지 않은 무책임한 폭로까지 난무, 국회의원의 면책특권까지 논란의 대상이 됐다.
폭로정국의 핵심인물은 단연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 옷로비사건과 언론문건 파문 등 중요한 고비마다 특유의 정보력을 과시하며 집요하게 여권을 공격했다. 특히 언론문건 파문이후 정의원의 말 한마디에 이종찬·천용택 전국정원장 등 현 정권의 실세급 인사들이 정치적 위기에 처하거나 낙마하는 불운을 겪었다. 한나라당 이신범 의원도 폭로전에 가세했고, 국민회의 김영환 의원은 정의원의 사설공작팀 운영설을 폭로하며 역공을 가하기도 했다.
한편 국감기간에는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이 휴대폰 도·감청 의혹을 줄기차게 제기한데 이어, 이부영 총무가 국가정보원의 도·감청 의혹을 폭로, 온나라를 「도·감청 논쟁」으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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