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메아리] 이몽룡의 직권남용 - 문창재

입력
1999.12.27 00:00
0 0

춘향전은 한국의 대표적 고전문학 작품이다. 통쾌하게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애인을 구출해 금지된 사랑을 완성한 스토리가 모두에게 친밀감을 주어 영화 와 무대공연물의 단골소재가 된다. 그러나 지루한 4·4조 사설의 연속과, 아직 10인 이몽룡이 이별한지 1년만에 암행어사가 되어 옥에 갇힌 춘향을 구출한다는 비현실성이 소설적인 재미를 반감시킨다. 그런데도 춘향전이 국민적 사랑을 받는 것은 극적인 반전 끝의 권선징악적 해피 앤딩이 서민대중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되기 때문이리라.우리가 이 소설을 읽고 이상하게 느끼는 것은 사설조 문장이 읽기에 지루하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외국인 눈에는 뜻밖의 문제점이 발견된다. 고려대에서 홍일식교수에게 춘향전을 배운 한 외국인 유학생은, 암행어사사가 된 이몽룡이 곧바로 남원으로 달려가 제일 먼저 춘향을 구해낸 일이 공직자로서 사적인 데 직권을 사용한 비리가 아니냐고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이런 안목으로 작품을 다시 읽어보면 공·사 구분이 없는 여러가지 부조리가 발견된다. 사위의 어사출도 소식을 들은 월매가 춤 추며 동헌으로 달려가면서괜스레 관속들에게 행악하는 장면, 관속들이 월매에게 절을 하며 아부하는 장면, 몽룡이 다른 죄인은 젖혀두고 춘향만 구출하는 장면 등이 눈에 거슬린다. 남원부사 변학도의 생일잔치에 각 고을 수령들이 모여 질펀하게 먹고 마시고, 이몽룡이 춘향과 월매를 호화로운 가마에 태워 서울로 보낸 뒤에야 암행어사 일을 보러 떠나간 것도 직무태만과 직권남용의 전형으로 봐야 한다.

작품 속에서 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은 것은 그것을 나쁜 일로 보지 않는, 공직자 비리를 지극히 당연시했던 당시 국민일반의 의식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아름다운 사랑만을 강조하느라고 그렇게 쓴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본다면 조선중기 공직기강의 실상을 말해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어찌 춘향전 뿐이랴. 민중에 대한 직접적 피해와 무관하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오히려 약과다. 민중의 고난을 소재로 한 민족문학의 대작들--홍명희의 「임꺽정」, 황석영의 「장길산」,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아리랑」과 「태백산맥」같은 작품은 직위의 높낮이를 불문하고, 남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어떻게 나라와 민중의 운명을 주물렀는지를 말해준다.

근래에 출간된 정완기씨의 역사소설

은 권력의 상징인 제왕조차 무반의 칼끝에 힘없이 목숨을 잃고 자리를 내쫓겼던 기막힌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 정중부는 문반들의 사치와 나태로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잡겠다는 명분으로 칼을 들었으나 새로 득세한 무반들의 횡포 앞에 무력했고, 심지어 물욕에 눈이 먼 아들과 사위조차 제재하지 않았다. 뒤 이어 칼로 권세를 잡은 이 고·이의방·이의민·경대승 같은 무반들은 사욕에 눈이 멀어 제 명에 죽지 못했다. 최충헌은 국정을 개혁하고 국방을 튼튼히 해 거란족 침략과 몽고의 위협을 이겨낸 큰 공을 세웠으나, 멋대로 임금 둘을 폐하고 넷을 세운 전대미문의 칼 권력을 휘둘렀다.

관속들이 사사로이 직권을 쓰고 백성들이 그것을 당연시하는 폐풍은 오랜 세월 한국인의 체질속에 쌓여 생리가 되었다. 지도층의 부정부패에 흥분하기에 앞서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볼 일이다. 나는 교통신호 같은 사회적 약속을 잘 지키고 있으며, 경찰이나 단속공무원에게 돈준 일이 없는지를.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해 권한과 재량의 한계를 벗어난 일처리는 없는지, 친구와 친지 동문 동향인을 봐주기에 월권을 한 일은 없는지도 한번 돌아볼 시간이다. 춘향전을 읽고 이몽룡의 직권남용을 지적해 내는 공익우선 의식을 가질 때만 2,000년대와 21세기는 우리에게 희망의 연대가 될 것이다.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