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파리주재 독일대사관엔 프랑스 육군의 기밀이 담긴 익명의 편지 한통이 배달됐다. 편지를 입수한 프랑스는 배신자를 찾아 나섰고, 유대인 포병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대위가 범인으로 체포된 것은 직후였다. 드레퓌스의 필적이 편지필적과 비슷하다는 한가지 이유였다. 비공개 군사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지만 성난 여론 덕에 특별사면되고 뒷날 무죄선고를 받는다.■조작된 사건뒤엔 진실을 밝히려는 작가의 양심이 있었다. 세계적 명성의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는 신문기고문을 통해 드레퓌스의 무고함을 호소한 것도 이때다.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인 프랑스 군 당국은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오히려 국수주의 언론등과 함께 역공을 취했다. 국가기관 모독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졸라는 망명길에 오르게 되고 몇년뒤 한많은 생을 마감한다. 이것이 공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된 대표적 인권유린 사례로 종종 인용되는 소위 「드레퓌스 사건」의 줄거리다.
■작년 1월 시라크대통령은 『아직도 불의가 미혹할 수 있지만 진리의 세력이 감시의 눈을 번뜩이는 한 프랑스는 보다 나은 선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졸라와 드레퓌스 가족에게 뒤늦게 공식사과했다.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는 기고문을 발표한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시라크의 사과서한에 대해 언론들은 프랑스판 「역사바로잡기」라고 했다.
■한 파렴치한 부패 기업인의 구속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른바 옷로비사건이 전직 검찰총수와 대통령 법무비서관의 사법처리로 사실상 대미를 장식하는 것 같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했던 법무비서관은 『잠시 광풍(狂風)에 휘말려 음모의 늪에 빠졌던 드레퓌스대위의 고뇌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악덕재벌의 덫에 빠진 경우라면 드레퓌스사건은 분명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노진환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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