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최고정보를 다루는 기관의 장(長)의 언행이나 처신이 어떠해야 한다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나, 처신의 한자락이 국가안보나 국정운영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 전신인 안기부의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고 했던 부훈이 암시하듯, 국익을 지키기 위해 주로 음지에서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 이들에게 맡겨진 과업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생색이 날 만한 일도 정보기관의 생리적 한계 때문에 주로 익명성으로 처리되는 것이 관행이다. 시쳇말로 「재주는 누가 넘고 돈은 누가 먹는다」고 해도 이를 기꺼이 수용해야 하는 것이 정보기관의 생리다. 외국에서 최고 정보기관의 장을 흔히 「스파이 수장(Spy Chief)」이라고 하는 이유도 익명성이 강조되는 그 업무와 무관치 않다. 따라서 국가최고 정보기관 수장의 한마디 한마디는 사려깊어야 하고, 처신 또한 매우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23일 김대중 대통령이 단행한 천용택 국가정보원장의 전격적인 경질의 불가피성을 이해한다. 인사의 요인이 생겼음에도 적기를 놓쳐 국정운영에 걸림돌이 된 사례를 그동안 몇차례 경험했기 때문이다. 천 원장은 지난 15일 검찰출입기자들과의 만남에서 행한 언행이 국가정보기관의 장으로서 부적절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최근 잇달아 일어난 전직 국정원 총수들의 이같은 실언과 부적절한 처신은 국정원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할 정도였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 통치권 차원에서도 이번 인사가 불가피했지만, 국정원 자체도 이번이야 말로 환골탈태해 명실상부한 최고정보기관으로서 자리매김 해야 하는 절박한 시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묵은 정치간여 시비를 불식시키는 일이 급선무다. 안보·대공(對共)·경제·과학 등 본연의 업무에 진력하는 것이 혁파의 첫 단추여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후임 국정원장으로 임명된 임동원 원장의 역할에 남다른 기대를 갖고 있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또 대북정책의 실무책임자인 통일부 장관으로서 쌓아온 그의 이력이나 능력으로 보아 우리는 그 기대가 결코 부풀려졌다고 보지 않는다.
공직자의 헤픈 입과 가벼운 처신 때문에 국정운영이 장애받는 일이 두번 다시 있어서는 안되겠다. 국정원장과 통일부장관의 인사가 흐트러진 민심을 다잡아 차질없는 국정수행을 위한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어야 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