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프로야구 감독으로 84년과 92년, 두 번 우승했는데 공교롭게도 우승팀은 둘 다 롯데였다. 하지만 같은 우승이라도 내가 느끼는 감동에는 큰 차이가 난다. 84년에는 최동원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있었고 상당한 행운이 따라주었지만, 92년에는 무명 선수들로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듯한 과정을 거쳐 우승을 차지했다.91년 롯데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나는 『3, 4년쯤 후라야 우승을 노릴 수 있을 것 같다』며 매우 조심스럽게 계획을 밝혔다. 92 시즌이 시작하기 전, 롯데를 우승후보로 꼽은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난 베테랑이라야 윤학길 김민호 공필성 정도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넌트레이스에서 롯데는 3위를 차지했다. 전준호 이종운 박정태 등 신인 내지 무명의 선수들이 3할대 타격을 선보였고 그해 부산고를 졸업한 염종석은, 고작 1,0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도 무려 17승이나 거두며 신인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는 포스트시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삼성과, 플레이오프에서는 해태와 붙었는데 어렵지 않게 물리쳤다.
드디어 한국시리즈. 상대는 빙그레였다. 해태가 결승에 오를 것으로 예상한 빙그레는 우리 팀이 한국시리즈 파트너가 되자 『해보나마나 이길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하는 것 같았다. 빙그레는 페넌트레이스에서 13승5패로 롯데에 일방적 우세를 보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페넌트레이스와 플레이오프에서 기대 이상의 실력을 발휘한 우리 선수들에 대해 굳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1차전에서 우리 팀은 박동희가 나서 송진우가 선발로 나선 빙그레를 8대6으로 물리쳤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결국 우리가 4승1패로 우승했다. 당시 우리 선수들은 평소 실력의 150%를 발휘했다.
나는 92년 우승을 계기로 지도자는 아랫 사람이 제 실력, 때에 따라 그 이상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고 용기와 힘을 돋아주어야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명이라도, 실력이 검증되지 않는 신인이라도 흥이 나고, 해보겠다는 투지로 뭉친다면 그들은 언제라도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강병철·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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