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을 유산들이 별로 없다. 문화분야는 버릴 것들로 가득하다. 독창성과 창의력의 부족은 물론 구조적인 문제점까지 「문화의 시대」라는 21세기에 걸맞기 위해서는 과감히 버리고 도려내야 할 것들이 산재해 있다. 표절, 거품, 지나친 상업성, 권위, 문화예술인간의 대립과 반목, 불합리한 유통구조 등…. 장르 별로 짚어본다.◇문학
「팔린다」는 기준에서 문학작품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99년 우리 문학시장은 바닥을 헤맸다. 고급한 문학이 대중성을 겸비하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이같은 현상을 문학이 대중으로부터 「소외」 당하는 것으로 해석할 경우 문제는 달라진다. 많은 평자들은 최근 우리 문학이 독자들의 의식을 앞서가기는 커녕 뒤쫓아가지도 못한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감상적인 자기 위안이나 나르시시즘적 서사에 빠져, 사회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대를 초월하고 우주까지 넘나들어야 할 문학적 상상력을 보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같이 나약한 90년대적 문학현실은 우리 작가들부터 극복해야 할 유산이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의 문학교육이 제대로 서야 한다는 지적을 하는 이들도 많다. 실제적으로 문학을 향유하고, 문학적 정신을 배양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학교교육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양희(57) 시인은 『시 교육이 사지선다형이나 엉터리 암기식 교육으로 청소년들의 문학적 감수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출판, 학술
IMF 체제 이후 국내에서 손꼽히는 책 도매상들이 무너지고, 출판사들이 잇따라 도산한 것은 어음 위주의 전근대적인 유통 관행에서 비롯했다. 불투명한 거래, 그것을 빌미로 유통을 손에 쥔 사람들이 전횡을 휘두르는 출판계의 악행은 세기를 넘기면서 버려야 할 것들이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이제 삼척동자도 모두 아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불합리한 교수 채용, 연구는 않고 평생 교수의 혜택을 누리는 학자들이 수두룩하던 대학 풍경은 바뀌고 있다. 불합리에서 합리로, 전근대에서 근대로 대학이 변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이른바 「시장 논리」 「소비자(학생) 우선」 원칙 때문에 학술계는 큰 위기를 만났다. 교육 시장의 왜곡에 책임지지 않는 행정가들, 내 일이 아니면 몰라라 하는 학자들의 이기주의를 버려야 한다.
◇공연예술
음악·무용·연극 공연은 거품 투성이다. 과시용·실적쌓기용 공연이 여전하다. 관객을 배려하지 않는, 이러한 자기만족형 공연은 결과적으로 대중의 무관심을 낳는다. 대중과 격리된 무대예술은 존재 이유가 없다. 관객이 없다고 푸념하지 말고, 무대예술가 스스로 관객 개발에 힘써야 예술시장이 형성될 것이다.
그러려면 진짜 프로가 나와야 한다. 교수와 예술가, 이론과 실기가 어정쩡하게 뒤섞인 현재의 예술교육 제도나 무대 관행을 버리고 하루빨리 전문적인 분화가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예술가가 살고 무대가 살고 예술이 산다.
학맥·인맥의 파벌과 연고주의, 범람하는 초대권, 맹목적인 외국 유학 열풍, 참된 비평의 부재, 예술 지원의 탁상행정도 버려야 할 유산이다. 예컨대 한국음악협회 이사장 자리는 20년 넘게 서울대 교수들 차지다. 「끼리끼리」 문화의 폐쇄성은 창의력이 생명이어야 할 예술에 족쇄가 되고 있다. 문화부의 탁상행정은 무책임한 「한건주의」를 양산하고 있다. 문제투성이 공연장이 모범사례로 선정되기도 하고, 문예진흥기금 지원은 선정방식과 사후평가에서 신뢰를 받지못하고 있다.
◇미술
미술계의 고질적 문제점 중 하나는 가짜 그림 시비. 음성적인 미술품 거래와 이에 따른 위작유통이 끊이질 않고 있다. 올 봄에도 청전 이상범의 그림을 위조한 권춘식씨 일당이 구속되는 등 IMF로 가뜩이나 얼어붙은 인사동 일대는 가짜그림 시비로 찬바람이 일었다.
진위여부도 가리지 못한 이같은 위작시비가 해마다 거듭되고 있는 이유는 그림값은 턱없이 높고, 급증하는 그림수요에 공급이 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한국영화계의 고질적인 병폐는 밥그릇 싸움. 말이 신·구 대립이고, 보수와 개혁의 갈등이지 내용은 지독한 집단 이기주의이다. 그들의 감정적 갈등과 자기 몫 챙기기에 발목이 잡힌 것은 미래의 한국영화 산업.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올해 만들어진 영화진흥위원회의 파행이다.
가장 먼저 IMF 한파에서 벗어난 듯한 한국영화 시장은 그만큼 거품도 빠르게 생기고 있다. 스타 한 명의 출연료가 2억원이 넘는, 전체 제작비의 20%가 되는 스타시스템. 그러면서 영화의 완성도나 연기에는 책임질 줄 모르는 배우들. 영화산업 발전보다는 자금을 끌어 모으는 홍보수단쯤으로 영화를 생각하는 창투사들. 기본이 없이 잔재주를 스타일이라 우기며 잔뜩 폼을 잡는 감독들. 소수가 주류인 양 난리치는 왜곡된 마니아 문화.
이런 것들은 버리고 스크린쿼터사수 투쟁의 한마음과, 임권택 감독의 전통정서, 강제규 감독의 대중성, 심형래의 모험심, 「박하사탕」(감독 이창동)의 리얼리즘과 반(反)스타시스템,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감독 이명세)의 색채미학, 「주유소습격사건」(감독 김상진)의 감각만 21세기로 가지고 가자.
◇대중음악
표절의 망령은 외국 노래의 소절 따오기를 넘어 가수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과정에까지 침투했다. 조성모가 「얼굴없는 가수」 「영상미 뛰어난 뮤직 비디오」 전략으로 성공하자 유사한 기획이 수십건에 이른다. S.E.S와 H.O.T 등이 성공하자 유사한 걸그룹, 보이그룹이 우리 가요게의 대표적인 트렌드가 된 지 오래다. 방송은 비주얼한 10대 문화만을 부추긴다. 대중이 좋아하는 문화가 아니라 대중이 소비하는 문화에 대한 지나친 의미 부여는 결국 세대간 문화의 단절을 가져왔다.
보여주기 위한 「립싱크」만이 횡행하는 풍토에서 꾸준히 라이브무대만을 고집하는 실력있는 가수들의 노력은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포크의 부활운동, 조용필 신중현 등 대가의 공연 등도 대중가요에 자양분이다.
◇방송
일본 방송 표절은 21세기까지 이어질 것인가. 표절이 하도 심하다보니 일본 방송 관계자가 한국의 방송사를 항의방문하기도 했고, 방송위원회는 표절여부를 판정하기 위해 일본 현지인을 고용하는 고육책까지 내놓았다. 외국 것만 베끼는 것이 아니라 경쟁방송사의 프로그램이 떴다 하면 그것도 금방 베낀다. 표절은 문화의 토양 자체를 스스로 약화시켜버리는 자기 파괴행위다.
시청률 지상주의도 버려야 할 유산이다. 시청률이 오르면 엿가락처럼 늘리고, 저조하면 중도에 하차하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여전했다. 감각만을 자극하는 프로그램보다 심도있는 다큐멘터리, 여론을 활성화하는 토론프로그램 등 방송의 공적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정치권으로부터의 완전 독립 역시 실현해야 할 대목이다.
■[특별기고] 문화의 존재이유는 결코 돈벌이가 아니다
20세기의 끝자락을 접으면서 새로운 세기를 이리 저리 예측하고 전망하는 논의가 무성하다. 그 가운데 흔히 들을 수 있는 것이 새로운 세기는 문화의 시대가 되리라는 전망이다.
사실 문화의 시대라는 담론은 90년대 초에 등장했다. 80년대가 억압적 파시즘의 지배에 맞선 강력한 이념 투쟁의 시기였다면, 90년대는 대중의 일상과 정서를 읽고 거기에 기반해 사회적 진보를 모색하려는 시도가 중요하게 부각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가고 문화의 시대가 왔다는 표현이 유행처럼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문화는 적어도 돈벌이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대중의 일상적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라는 진보적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정부와 언론, 대기업이 앞다투어 내세우는 「문화의 시대」는 「문화가 돈이 된다」는 천박한 경제주의에서 그다지 벗어나 있지 않다. 문화를 단지 정권 안보와 국민통합을 위한 이데올로기 도구로 보던 군사 정권의 억압적 정치 논리가 뒤로 물러나면서 문화를 그저 돈벌이의 프리즘으로만 보는 자본과 시장의 논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나선 것이다.
따지고 보면 경제지상주의는 지난 수십 년간 우리의 삶 전반을 가장 강력하게 규정해 온 가치체계였고 지배원리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선진국들이 수세기에 걸쳐 이룩한 산업화를 불과 30-40년 만에 달성할 수 있었지만 그 결과 수많은 상처와 모순을 떠안아야 했고 IMF사태는 그 구멍 뚫린 근대화의 참담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진정 문화의 시대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IMF사태가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대화를 이끈 경제주의 패러다임의 위기이며 이의 극복을 위해선 삶의 질과 가치, 욕망의 시스템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요컨대 문화를 사회와 삶의 중심에 놓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글로벌 시대의 또다른 경제주의는 문화마저도 탐욕스러운 자본 논리로 재단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주의는 결과적으로 오히려 문화의 산업적 가능성을 약화할 뿐이다.
문화는 단기적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서 상품이기 이전에 인간적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과정이며 장기적 삶의 발전을 위한 자원이다. 대중이 진정 문화의 주체로서 자신의 문화적 삶을 풍부하게 갈무리할 수 있을 때 이른바 문화산업의 경쟁력도 생기는 것이고 장기적으로 문화의 이윤산출 가능성도 커지는 것이다.
단기적 이익에 급급한 천박한 경제주의와 시장논리는 문화의 상품적 가능성마저도 압살하는 재앙으로 기능할 뿐이다. 경제주의에서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문화의 경제적 가치는 생성된다. 이 역설이야말로 새로운 세기가 진정 문화의 시대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이다.
김창남(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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