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내 시의 한순간] (37) 이동순 '가시연꽃'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내 시의 한순간] (37) 이동순 '가시연꽃'

입력
1999.12.20 00:00
0 0

「봄의 설법」이후 4년만에 내는 여덟번째 시집 「가시연꽃」(창작과비평사 발행)이 출간되던 날, 나는 꼭 늦동이로 태어난 내 아기를 만나러 병원으로 서둘러 가는 아버지의 심정이 되어서 출판사를 찾아갔다. 미리 책의 윤곽이나 됨됨이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한 꾸러미의 시집이 내 앞의 탁자에 갖다 놓이자 나는 왠지 눈이 부셔서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쓴 작품들이 고스란히 책갈피를 채우고 있지만 어쩐지 서먹하고 낯선 느낌조차 들어서 한참을 뜸들인 끝에 조심스럽게 한 권을 집어들고 책장을 펼치었다.이제 이 책 속의 시작품들은 저마다의 생명을 지니고 세상의 바람 속으로 떠나가게 될 것이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 시작품들은 원래 우주 속에 하나의 영적인 기운으로 사운대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이 어떤 언어적인 형태를 지니고 세상에 태어나는 일에 약간의 조력만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시집의 주인이 아니라, 산파(産婆)역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우주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하는 그런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나는 참으로 기뻐하고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내 친구 박은 시집이 출간되었다고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었다. 눈발이 부리는 세기말의 세 밑, 나는 정다운 제자들과 더불어 달성 하빈의 낙동강 가에 있는 삼가헌(三可軒) 고택으로 우루루 몰려갔다. 삼가헌은 순천 박씨 일파가 누대에 걸쳐 살아온 전형적인 조선조 중엽 이후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드라마 「토지」의 촬영 장소로도 이용되었다는 하엽정(荷葉亭) 앞 연당에는 물이 말라 바닥이 드러났고, 목이 꺾인 채 바싹 말라있는 연대 위로는 쓸쓸한 겨울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미리 장작군불을 넉넉히 넣어둔 방바닥은 기분 좋게 따끈따끈하였고, 서로의 눈빛을 마주치면서 술잔을 나누는 방 창호지에는 잎진 매화나무의 성근 가지가 비치었다. 박의 부인은 잡채랑 호박전이랑 연신 맛있는 요리 접시를 안채에서 사랑방으로 옮겨 나르느라 찬바람에 코끝이 빨개져 있었고, 나는 벗과 제자들의 축복과 덕담 속에서 너무도 과분하고 푸근한 친교의 시간을 즐기었다. 세상사는 기쁨이란 참으로 여러 가지일진대, 벗이 정성껏 마련해준 이런 자리야말로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런 시간인가. 이로 말미암아 나는 자꾸 시를 쓰고, 또 시집도 내고 싶어지는 것이다./시인·영남대교수·시집 「개밥풀」 「 물의 노래」등.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