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이 미국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되면서 핵개발 의혹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 사이의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이 줄다리기는 전쟁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던 몇차례 위기를 거치면서 마침내 94년 10월 21일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서 조인으로 일단락되었다.제네바 기본합의서는 외형적으로는 북한이 영변의 중수원자로 두 기와 핵재처리시설 개발을 동결하는 대가로 미국은 자신의 주선으로 국제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북한에 경수로 발전소를 책임지고 제공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지만, 그 속내는 사실은 탈냉전 이후 북한과 미국 사이의 정치·군사적 관계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즉, 제네바 기본합의서는 이른바 북한 「핵위기」의 해결책으로 제시되었지만 실은 탈냉전 이후 한반도질서 재편방향을 둘러싸고 북한과 미국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외교전의 중간 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과정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은 봉쇄전략 하의 군사적 대결정책 일변도였다. 미국은 북한을 대화 상대자로 생각하지 않았고 심지어 미국 국무부는 제3국에서 외교관 사이의 우연한 접촉마저 금지하였다. 북한은 70년대 이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한다는 목표 하에 북·미 직접협상을 제안하였지만 미국은 북한의 대화 제의를 일체 무시해왔다. 그러나 미국은 탈냉전 시기를 전망하면서 이미 레이건 행정부 때인 88년 베이징에서 북한과 참사관급 접촉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 이전의 직접협상 배제라는 원칙에서 보면 획기적 변화였다. 미국은 이때의 외교적 노력을 「조심스런 주도권(Modest Initiative)」으로 불렀다.
부시 행정부에 들어서도 미국의 대북한 접촉은 계속되었고, 92년 1월에는 뉴욕에서 처음으로 북·미 고위급회담이 열리기에 이르렀다. 이 자리에는 미국을 대표하여 아놀드 캔터 국무부 정무차관과 북한을 대표하여 김용순 조선로동당 국제부장이 참석하였다. 이 회담에서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 핵안전협정에 서명하고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받아들일 것을 약속하였다. 이때만 해도 91년 12월 남과 북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하는 등 남북관계도 개선되고 있었고, 미국도 국방장관 딕 체니가 남북한 핵시설에 대한 상호사찰을 제기하는 등 낙관적 분위기 속에 북·미협상이 진행되었다.
■ 북한의 「벼랑끝 외교」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었고, 92년 10월께부터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이 핵무기 개발사업과 직결되어 있다는 의혹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면서 북미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하기 시작하였다. 국제원자력기구는 93년 2월부터 갑자기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하였고, 미국 정부는 3월에 들어 부시 행정부 때 중단하였던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을 종전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준비하였다. 미국의 정치·군사적 압력에 대하여 북한도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북한은 팀스피리트 군사훈련이 재개되기 하루 전날인 3월 8일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동원태세에 들어갔으며, 3월 12일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 합의서 조인
북한의 「벼랑끝」외교는 북미회담의 재개로 이어졌다. 93년 6월 뉴욕에서 핵관련 북·미 1단계 고위급회담이 열렸고, 양측 대표로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정치·군사담당 차관보와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양측은 여섯 개 항으로 이뤄진 공동선언문에 합의했다. 미국이 제시한 안보 보장, 공식 대화를 지속한다는 양측 합의,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동안 NPT 탈퇴를 유보한다는 북한측 결정이 선언문 요지였다.
7월에 제네바에서 열린 2단계 고위급회담에서는 경수로 공급이 주요 의제가 되었다. 한편에서 특별사찰 문제를 둘러싸고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정부는 영변 핵시설 폭격을 준비하는 등 군사적 제재조치까지 불사하는 강경한 대응책을 준비하였다. 북한에 대한 군사 공격은 실행 일보 직전에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중재가 양측에 의해 받아들여짐으로써 극적으로 중지되었다.
8월부터 3단계 고위급회담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10월 북한의 핵개발계획 동결과 미국측 주선에 의한 경수로 보장, 북미 간의 관계정상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제네바 기본합의서가 양측에 의해 조인되었다.
■ 제네바 합의 이후
「핵위기」를 둘러싼 협상 과정에서 미국과 북한은 집요하게 자신의 정치·군사적 구도를 관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미국은 협상과 군사적 압력의 두 가지 방법을 교대로 구사하면서 개혁·개방을 유도하여 북한을 연착륙(soft_landing)시키려고 했다. 연착륙정책의 전략적 기조는 개입·확장(Engagement·Enlargement)전략이고, 미국 관리의 말대로 이 전략은 한·미 안보동맹을 기반으로 하면서 북한에 대한 외교적 주도권으로 이것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반면 북한은 회담 전과정에서 집요하게 국교수립, 평화체제 보장을 미국 측에 요구하였다.
제네바 기본합의서는 이러한 양측의 입장과 요구가 절충된 것이었다. 제네바 기본합의서는 북·미 간에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지만 그 이행은 그리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다. 제네바 합의 이후 98년 금창리 핵시설 의혹, 99년 서해교전사태에서 보듯이 날카로운 대결국면이 조성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북한은 미사일 개발과 「핵모호성 정책」으로 맞서고 있다. 과연 새 천년에는 이러한 군사적 대치와 긴장상태가 해소될 수 있을 것인가. 새 천년은 우리 민족에게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에서 민족적 발언권의 확보라는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 참고문헌
▲정영태 「북한 군사정책의 전개 양상과 핵정책 전망」(93·민족통일연구원)
▲돈 오버도퍼 「두개의 코리아」(98·중앙일보사)
▲Lion V Sigal 「Disarming Strangers: Nuclear Diplomacy with North Korea (98·Princeton University Press)
■ 필자 약력
▲60년 서울 출생 ▲83년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96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문학박사 ▲86~97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연구원 ▲97년-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저서 「탈냉전과 미국의 신세계질서」(역사비평사·편역·96)
「한국현대사 강의」(돌베개·공저·98) 논문 「해방 이전 미국의 대한 구상과 대한정책」 「1947년의 철군 논의와 미국의 남한 점령정책」 「미군정기 이승만의 방미외교와 미국의 대응」 「1942∼47년 미국의 대한정책과 과도정부 형태 구상」(박사학위논문) 「이승만정권·자유당·민주당」 「이승만정부의 붕괴」
정용욱(鄭容郁·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현대사 다시쓴다] 한.미 전문가 진단 북한미래는
북한 핵 위협이 고조되던 92-93년, 미국 정부가 행한 한국민의 통일에 대한 여론조사는 흥미있는 결과를 보여준다. 90년대 이후 워싱턴DC에 있는 미국 공보원은 한국의 여론조사기관을 통해 매년 정기적으로 통일과 남북관계, 미국의 대한정책과 반미감정 등에 관한 여론을 조사해왔다.
92년 가을 조사에 따르면 10년 이내에 통일이 가능하다는 견해(58%)가 불가능하다는 견해(36%)보다는 많았다. 그러나 93년 민족통일원이 1,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5년 이내 가능하다는 의견이 7.8%, 5-10년 이내 가능하다는 여론이 37.3%로 미국공보원 조사에 비해 10% 이상 차이가 날 정도로 크게 낮아졌다. 통일이 절대불가능하다는 의견도 13.3%에 달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위협과 이에 대한 국제 제재 여론이 한껏 고조되었던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미국 공보원의 일련의 조사에서 주목되는 또 다른 점은 북한의 침략위협 정도를 묻는 설문. 88년을 경계로 한국민들은 북한의 침략위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북한의 침략위협이 크다고 답변한 비율이 86년에는 65%였으나 88년에는 36%로 뚝 떨어졌고, 89년 24%, 80년 전·후반기는 각각 22%와 17%, 91년에는 21%였다.
이 시기를 전후한 사회주의권의 붕괴, 북한의 경제위기 등으로 인해 북한의 군사역량이 남한을 전면 침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느꼈거나, 남한의 군사적, 경제적 역량이 북을 압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92년, 93년 전반에는 각각 북한의 침략위협이 있다고 응답한 피조사자의 비율이 37%, 35%로 크게 뛰어올랐다.
한국에 외환·금융위기가 닥친 97년 후반 이후의 상황은 어떤가. 햇볕정책과 경제 분야의 교류가 추진되면서 이전과 같은 노골적인 흡수통일론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흡수통일론자조차 단기간에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올해 5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샌디에이고)에서 열린 「한반도의 안보와 안정」학술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각국 전문가들은 통일이 10년이상 걸릴 것이라는 의견이 71%, 5~10년이 21%로 한국이 중단기적으로 통일할 것같지 않다고 전망했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의 미래에 대해 대부분의 한국 전문가들이 붕괴할 것이라고 답한 데 비해, 미국인들은 그럭저럭 버텨나갈 것으로 답한 점이다. 북미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는 미국측은 북한 정세가 호전될 것이라 보고 있는 반면, 남한 측은 여전히 북한 정세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