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원 "혼내서라도 밝혀라"김근태씨 고문사건은 지난 85년 8월말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수사단이 민추위 사건을 수사하면서 민족민주혁명론(NDR)의 배후인물로 당시 민청련 의장이던 김씨를 지목, 내사에 착수하면서 시작됐다.
85년 9월4일 전격 연행된 김씨가 묵비권을 행사, 수사가 부진하자 당시 박처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장은 고문기술이 뛰어난 이근안 경기도경 대공분실장을 수사에 투입키로 하고, 박배근 당시 치안본부장에게 건의해 허락을 받았다. 박씨는 『김씨 연행 다음날 아침 정형근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이 남영동 분실을 방문, 김씨의 묵비권 행사 등 수사상황을 보고받고 「혼을 내서라도 철저히 밝혀내라」고 지시해 이같은 조치를 취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이씨는 그날 저녁부터 김씨 수사에 투입됐다.
이후 이씨 등 대공수사 요원 9명이 23일간 김씨를 수사하면서 김씨 옷을 벗기고 고문대(속칭 칠성판)에 눕힌 후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고문 등 10차례 걸쳐 온갖 고문을 자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박씨는 이같은 고문수사 상황을 수시로 박본부장과 정형근 단장에게 보고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박씨 역시 단장실 CC-TV를 통해 김씨 고문수사 상황을 점검한 뒤 조사실로 찾아가 김씨의 뺨을 때리는 등 고문행위에도 직접 가담했다.
김씨의 신병이 검찰에 송치된 직후 김씨 고문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검찰 치안본부 안기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대책회의가 열렸다. 검찰은 『당시 대책회의에 최 환 서울지검 공안부장과 주임검사인 김모 검사, 전희찬 안기부 대공수사국장과 정형근 단장, 박처원 단장 등 5명이 참석했다』며 『그러나 김씨 가족들에 대한 접견금지 조치만 내리고 고문진상 조사는 하지않았다』고 밝혔다. 특히 당시 주임검사인 김검사장은 『김씨가 절룩거리는 모습을 보고 고문을 당했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고문여부를 수사해달라고 명시적으로 요청하지 않아 조사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이후 당시 김씨 변호인인 이돈명(李敦明)변호사가 구치소에서 김씨를 접견한 자리에서 김씨로부터 『고문으로 생긴 발뒤꿈치 딱지를 법원에 물증으로 제출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구치소에 정식절차를 밟아 물증으로 제출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딱지」를 압수당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당시 이모 구치소장이 「딱지」를 압수한 뒤 처리여부를 당시 공안부장에게 문의했으나 「알아서 하라」는 답변을 듣자 자체 폐기했다』고 밝혔다.
한편, 최 환 전고검장은 검찰 수사발표와 관련, 『당시 합동대책회의에 참석한 일이 없으며 「딱지」는 보고를 받은 뒤 잘 보관토록 지시해 수사기록에 첨부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해명했다. 김검사장도 『대책회의에 참석한 적이 없으며, 당시 김씨로부터 고문당했다는 명백한 진술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박정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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