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어떤 자리에서 특정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을 위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대중적인 모임도 아니고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강연내용도 상당히 전문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끝난 다음 주최자의 「논평」이 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복잡하게 말씀하시면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간단 명료하고 재미가 있어야지요』 실패한 강연에 대한 변명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논평이 지적하는 「현실」을 철저하게 승인해야겠는데, 그 다짐이 쉽게 되지 않는 괴로움을 털어놓고 싶은 것이다.세상이 하 빨리 돌아가기 때문인지 요즘 책들을 읽어보면 글들이 무척 짧다. 긴 문장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대체로 문장들이 단문이지 복합문장이 아니다. 그래서 산뜻하고 명쾌하다. 게다가 쉽다. 도대체 쉬운 글이 아니면 「현학적인 위선」을 범하는 것이라는 꾸중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그런지 이를테면 흔히 사용하는 어떤 개념에 대한 모호성을 개진한다든지 상식을 되물어 그 인식범주나 기반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면 여지없이 관념론자로 치부되면서 비현실적이거나 반역사적인 인간이 되어버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말도 그렇다. 호흡이 긴 발언은 아무도 경청하지 않으려 한다. 잦은 호흡으로 숨가쁘게 똑똑 끊어지는 말이 아니면 아예 경청을 자극하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하긴 그렇다. 어떤 사태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있다면 그 말이 길고 복잡할 까닭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니, 횡설수설하지 말고 한 마디로 말해봐』라고 하는 말은 당위를 넘어 오늘의 도덕을 요청하는 「도덕 이전」이고, 한 마디로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그 발언이 「마침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할지라도 「부도덕」의 전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오늘을 살기 위해 「짧은 글」을 써야 하고 「짧은말」을 해야 당연하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자. 더 짧게, 더 짧게 나아가다 가장 짧은데 이른 글과 말은 어떤 것들인가? 혹 시를 짧은 글과 말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여느 사람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긴 말과 글이 「압축」된 것이지 처음부터 그대로 짧은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만나는 짧은 말과 글은 대체로 감탄문이거나 명령문이거나 욕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과 글이 짧아져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 언어문화가 감탄과 명령과 욕설의 소용돌이를 빚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소용돌이는 불안하다. 감탄 이외의 어떤 반응도 자아내지 못하게 하는 단정적인 권위주의적 발언이 일상화되면 더불어 사는 삶은 서서히 질식해간다. 이견을 수용하지 않는 명령만이 힘의 실체로 현존하는 사회는 노예적 의존을 생리화해 간다. 시비의 가림이 방기된 채 욕지거리만이 난무하면 사람의 존엄함이 흩어 사라진다.
종교의 역사를 보면 무수한 종교의 흥망과 성쇠가 한 눈에 보인다. 그런데 그 쇠망의 까닭이 흥미롭다. 짧은 말, 짧은 글이 판을 치면 반드시 그 종교는 오래가지 못했다. 제도적 권위가 「옳다」든가 「그르다」든가 하는 말로 경전의 가르침에 대한 경험들을 단순화 할 때, 사람들이 제각기 스스로 절규하는 내용을 기원에 담기보다 몇 마디의 주문으로 그것을 편리하게 대치할 때, 종교의 소멸은 언제나 현실화했다.
긴 글과 긴 말이 담는 치졸한 자기 은폐와 간교한 기만을 간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겪는 이상스러운 「감격의 정서」와 교묘한 「명령의 질서」와 본능적인 「욕설의 문화」는 아무래도 「짧은 호흡」에서 말미암은 것 같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글도 또 하나의 지극히 짧은 것이지만.
정진홍
서울대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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