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쓸만한데 고향이 그래서 금배지 달기가 하늘의 별따기지』『맑은 물에서 고기가 살 수 있나. 깨끗한 돈으로만 정치할 수 없지』 『그 사람은 역시 줄을 잘 섰어. 총재 마음에 쏙 들었으니 재선은 보장받은 셈이지』2000년 4·13 총선을 불과 4개월 앞둔 정치권의 칙칙한 풍경들이다. 20세기 한국 정치의 어두운 유산들을 그대로 간직한 채 새 천년을 맞이해서는 희망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게 각계각층의 한결같은 외침이다.
한국일보가 14일 정치·사회학자(10명), 여야의원(10명), 시민단체 간부(10명), 일반 시민(30명) 등 모두 60명을 대상으로 「20세기 한국 정치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유산」에 대해 조사한 결과 (2개씩 응답) 「지역 감정」(37명)과 「정경유착 및 부패정치」(24명) 「1인 보스 중심의 정당운영」(20명)등을 꼽은 응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
박정희(朴正熙) ·김대중(金大中)후보가 맞붙은 71년 대선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지역주의는 87년 대선 이후 여야 정당들이 각각 텃밭을 하나씩 차지하는 지역할거구도로 심화했다. 15대 총선결과 영남지역(총 76석)에선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이 51석을 차지했으나 국민회의는 한석도 얻지 못했다. 반면 호남권(총 37석)에선 국민회의가 36석을 당선시켰으나 신한국당은 1석을 얻는데 그쳤다. 남북분단에 이어 또 하나의 분단으로 자리 잡은 동서 대결은 「국민의 정부」에서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
박동서(朴東緖)서울대 명예교수는 『후삼국과 같은 정치구도에선 정당보스로부터 공천만 받으면 대부분 당선으로 연결되므로 유권자의 투표행위가 무의미해진다』고 지적했다. 서강대 손호철(孫浩哲)교수는 그래서 『지역주의의 최대 피해자는 일반 유권자들』이라고 말했다. 「망국병」인 지역할거구도는 정책·인물간 대결의 의미를 퇴색시켜 각 텃밭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 맹주 중심의 정당 시스템을 유지시켜준다. 또 정책대결이 사라진 정치 공간에선 지연·혈연·학연 등 연고주의와 돈이 판을 치게 된다. 결국 고비용정치와 부패정치 등의 합병증을 낳는다.
응답자들은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정치에 대해 「100점 만점에 50.9점」의 평점을 매겼다.
■정치분야
새 천년을 맞아 20세기 한국정치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유산은 지역감정, 정경유착 및 부패정치, 1인보스 정당체제 등 크게 세가지로 압축됐다. 한국일보가 14일 정치·사회학자(10명) 여야 국회의원(10명) 시민단체 간부(10명) 일반시민(30명)등 모두 60명을 대상으로 버려야 할 정치 유산 두가지씩을 고르도록 한 결과 「지역감정」을 꼽은 사람이 37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으로 24명이 「정경유착 및 부패정치」, 20명이 「1인보스 중심의 정당운영」을 지적했다. 이어 「돈많이 쓰는 선거문화」(7명) 「여야의 극한 대결」(7명) 「파벌주의」(6명) 「역대 대통령의 독주」(4명) 「의원들의 철새정치(잦은 당적변경)」(4명) 「폭로·선동정치」(2명) 「학연·혈연주의」(2명) 「공천제도의 비민주성」(1명) 순이었다.
제시한 응답 항목에는 없지만 「정책결정 과정의 불투명성」 「전쟁 가능성」 「룰을 지키지 않는 정치」 「권력정치」(이상 학자 응답) 「보복정치」(일반 시민 응답) 등을 버려야 할 유산으로 꼽은 경우도 각 한건씩 있었다. 응답층 별로 보면 여야 국회의원 10명 전원이 「지역감정」을 버려야 할 유산이라고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시민단체 간부중에는 「1인보스 정당체제」라고 응답한 경우가 6명으로 가장 많았다.
반면 20세기 정치에서 이룩한 성과중 다음 세기에도 우선적으로 이어가야 할 유산에 대해 물은 결과 「시민사회 성장」(34명) 「여야 정권교체」(22명) 「민주화 투쟁」(15명) 「군사정권 붕괴 및 민간정부 건설」(12명)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그 다음은 「지방자치 도입」(8명) 「자유민주주의 이념 도입」(8명) 「대통령 장기집권 방지」(5명) 「시민단체의 의정감시」(4명) 「선거민주주의 정착」(3명) 「여야 타협정치」(2명) 「국권 독립」(2명) 「특별검사제 도입」(2명) 「공동정부 실현」(1명) 순으로 이어졌다. 응답 항목으로 제시되지 않았는데도 정치학자 3명이 「선거민주주의 정착」을 꼽은 점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특히 모든 응답층에서 공통적으로 「시민사회 성장」이란 대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 이어가야 할 유산을 한데 모으면 「시민세력의 성장과 민주화」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100점 만점에 50.9점」 이번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이 오늘의 한국 정치에 매긴 평균점수다. 50점은 대학 학점을 기준으로 보면 과락과 통과의 경계선. 이에 0.9점을 보태 간신히 낙제를 면했다. 현실정치에 대한 불만을 그대로 보여주는 점수지만 다음 세기 한국 정치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열어둔 평가이기도 하다.
응답층별로는 시민단체 간부들이 43.5점을 주어 현실정치에 가장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10명의 응답자중 25점이 한명, 30점이 세명이다. 최근 대안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시민단체의 비판적 의식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일반시민들은 평균 49.43점을 주어 역시 상당한 불신감을 드러냈다. 최하 10점에서 최고 70점까지 편차가 다양했으나 대부분 60점 이하에 머물렀다.
반면 정치·사회학자들은 58.5점으로 가장 「후한」평가를 내렸다. 학자들은 우리 정치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긍정적 성과를 거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치의 당사자인 여야 국회의원들은 55.2점을 매겨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어느 정도 의식하는 분위기였다. 한나라당 모 의원이 75점으로 전체 응답자중 최고 점수를 준 반면 국민회의의 한 의원은 45점을 주었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지역주의 극복 어떻게
지역주의는 한국정치에서 만병의 근원이다. 「3김정치」로 표현되는 지역할거구도를 극복해야 지역당들이 없어지고 전국에 기반을 둔 여야 정당들이 민생문제를 놓고 신선한 정책 대결을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역주의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느냐에 따라 처방도 달라진다. 정치학자들은 지역간 불균형 개발, 지역 편중인사, 3김씨 등 정당 보스들의 지역감정 동원 정치, 지역주민들의 소외 심리, 선거제도의 문제점 등 여러 요인을 놓고 논쟁을 벌여왔다.
이화여대 조기숙(趙己淑)교수는 『외국에도 지역주의가 있지만 당내 민주주의가 살아있어 큰 문제는 되지 않고 있다』며 『우리나라에선 3김정치가 타파되면 지역주의는 상당부분 치유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정치학자는 『시민들 스스로 계층적·정책적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하고 지역간 교류를 확대하면서 지역주의 해결에 나서야한다』며 『이를 위해 진보세력의 정치권 진입장벽을 낮춰 이념·정책 정당이 등장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박동서 (朴東緖)명예교수는 『지역구도 완화를 위해서는 지역간 균형발전, 공정한 인사 등이 전제돼야 한다』며 『현행 소선거구제를 중선거구제로 바꾸는 것도 보완적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부 학자와 한나라당은 『중선거구제로 변경해도 지역주의는 변함없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서울대 사회과학원 김만흠(金萬欽)박사는 『중앙의 거대 권력을 둘러싼 양대 정치세력간의 제로섬게임이 지역주의를 심화시켰다』며 『지방분권을 확대하고 다당제를 유도해야 지역주의 폐해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자를 처벌하자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법률적 해법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다수의 견해다. 지역주의 원인도 다양한 만큼 복합적 처방을 해야 한다는 게 대다수 학자의 의견이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