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남북한 간에 도출된 합의문의 소식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세계는 냉전체제의 붕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탈냉전질서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었다.유럽은 냉전적 분할 구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중심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동아시아 역시 새로운 지역체제의 수립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한 간에 도출된 합의문은 동아시아지역에 있어서 탈냉전질서의 주요한 초석이 놓여지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남·북한 기본합의서)라는 긴 이름을 지닌 합의문을 탄생시키는데 있어서 산파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88년 남한측 강영훈 총리의 제의로 시작된 남북 고위급회담이었다.
91년 12월 10일부터 13일 사이에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의 본회담에서 정원식 총리가 이끄는 남측 대표단과 연형묵 총리가 이끄는 북측 대표단은 한국현대사의 새로운 획을 긋는 합의문을 도출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72년에 있었던 남북공동성명이 「상부의 명을 받들어」 잠행했던 이후락, 김영주 등 자연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서였던 반면 「남·북한 기본합의서」는 공개적으로 진행되어 남북당국자의 이름으로 발표된 합의서라는 점에서 큰 차별성을 지닌 것이었다. 전문을 포함하여 총4장 25조로 구성된 이 합의문은 동·서독 기본조약보다도 내용면에서 훨씬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았다.
「남·북한 기본합의서」 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에 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 견해가 우세하지만, 그것이 지니는 실질적 의미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약간의 견해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차이는 우선 남북한 기본합의서가 잉태된 배경에 대한 상이한 이해에서 비롯되고 있다.
「남북한 기본합의서」에 대한 과도한 평가를 경계하는 입장에서는 「남북한 기본합의서」를 냉전체제의 붕괴라는 국제적 상황이 빚어낸 『남북한 정치인들의 공동성명 내지는 신사협정』 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남북한 기본합의서」 가 잉태된 91년의 국제정세는 91년 8월 소련군부의 쿠데타 실패 이후 공산진영의 붕괴와 균열로 특징지워졌고, 이러한 국제적 환경에 대응해서 북한체제는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91년 10월 김일성은 전통적 맹방인 중국을 방문했지만, 중국 역시 중국식 개방정책을 권고하는 한편, 미국과의 대화를 종용함으로써 북한체제를 압박하였다.
특히, 90년 11월부터 91년 당시까지 50억 달러의 배상금문제가 오고가던 일본과의 수교협상은 남북대화의 진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한편 남한의 노태우정권은 정권이양에 앞서 자신의 북방외교에 화려한 종지부를 찍고 싶어했고, 결국 이러한 남한의 국내 정치적 동기가 남한체제로의 흡수통일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고자 했던 북한지도부의 욕구와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남·북한 기본합의서」 폄하론의 주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해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을 간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남북한 기본합의서」가 단순히 고위급 정치엘리트들 간의 협상의 산물이 아니라 오랜 평화적 통일운동, 특히 80년대 광범위한 대중적 통일운동이 남한은 물론 북한의 정치엘리트들을 움직인 결실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한은 공히 김일성의 민족해방론과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라는 극단적인 상호부정의 시대를 겪으면서, 상호체제의 인정과 협력을 통해서만이 남북한의 통일이 가능할 수 있다는 합의의 저변을 확대시켜왔고, 「남·북한 기본합의서」는 그와 같은 오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합의에 도달한 이후 발표된 남한측의 기조연설문이 무엇보다 먼저 『당사자 해결원칙에 입각한 남·북한의 자주적 노력』으로 「남·북한 기본합의서」가 탄생하였음을 강조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아울러 북한측은 91년 12월 24일에 개최된 노동당 제6기 19차 전원회의를 통해 「남북한 기본합의서」를 『근 반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남북사이의 첨예한 대결상태를 끝장내고 상호신뢰의 바탕 위에서 민족적 단합을 이룩하여 나라의
평화와 평화통일의 새 국면을 열어나가는 데서 획기적 의의를 가지는 평화통일강령』 으로까지 봉대하였던 것이다.
「남·북한 기본합의서」폄하론이 간과하고 있는 두번째 측면은, 비록 북한이 변화된 국제정세 속에서 자구책을 모색하기 위한 방편에서 남한과의 협상에 나선 것일지라도, 「남·북한 기본합의서」는 북한이 자구책을 모색하기 위한 주요한 동반자로서 남한을 선택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 남한에 대한 경제적 열세를 인정한 후에도 북한이 일관적으로 견지했던 논리 중의 하나는 남한은 허상이고 미국만이 실체라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남북한 기본합의서」는 탈냉전시대의 국제적 파도를 남·북한이 공동으로 헤쳐나가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전략적 술수가 아니라 북한내부의 논리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북한지도부에서는 비록 미세하기는 하지만 남한과 연대하여 미국에 저항하다는 연남항미(聯南抗美)의 정서와 미국을 통해 남한을 제어하고자 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의 정서가 병존하고 있었고, 「남·북한 기본합의서」는 전자의 입장이 강화될 수 있었던 중요한 근거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한반도문제가 미사일과 식량원조 등을 둘러싼 북미관계의 축에 의해 주도되면서, 남·북한간의 축을 지탱하는 「남북한 기본합의서」가 급격히 사문화 되는 경향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합의서의 이행에 미온적이었던 북한의 책임이었지만, 남한 역시 「남·북한 기본합의서」 를 중심으로 남·북한관계를 주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은 20일자에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서'
■김명섭(金明燮)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87년 연세대 정외과, 89년 동대학원 졸업
▲96년 파리1_ 팡테옹 소르본대 박사
▲96~97년 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 특별연구원
「21세기 한국의 외교정책」(나남출판, 99년, 공저)「1980년대: 혁명의 시대」(새로운 세상, 99년, 공저)「한국정치동태론」(오름, 96년, 공저)「해방전후사의 인식 4, 6」(한길사, 89년, 공저)「북한현대사1: 연구와 자료」(공동체, 89년, 공저)
「지배를 위한 통합: 트루만행정부의 지역통합전략과 삼각적 지역화의 기원」(불문, 96년) 「아시아_ 태평양 공동체의 서곡」(영문, 96년) 「남·북한관계에 대한 문명론적 조망」(97년) 「냉전연구의 현황과 전망」(97년) 「북한에 대한 오리엔탈리즘과 햇볕정책」(98년) 「탈냉전기 한국전쟁 연구의 동향」(99년)등.
「남북기본합의서 해설」(통일원, 92년). 「탈냉전기의 국제정치와 한반도통일」(안병준 저, 법문사, 93년) 「남북한 특수관계론 : 법적 문제와 그 대책」(제성호 저, 한울아카데미, 95년) 「한국정치동태론」(공저, 오름,96년)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방안」(이장희 저,아사연, 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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