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의 선거법 협상이 정도(正道)를 벗어나고 있다. 정치적 이해,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 유지욕(慾)에 얽매여 개혁 취지 자체가 크게 퇴색되고 있기 때문이다■협상 가로막는 여야의 불투명한 태도
여야 협상이 답보상태에 빠진 가장 큰 원인은 선거구제 문제에 대한 불투명한 태도이다. 특히 2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여당의 책임이 크다.
공동여당 핵심부는 이미 오래전에 『야당의 반대때문에 소선거구제 유지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으면서도 중선거구제를 고수하다 9일에야 복합선거구제로 선회했다. 이미 총무선에서 소선거구제를 전제로 선거구획정이 논의되고 있는 마당에 불거져 나온 복합선거구제 카드는 혼선만 가중시킬 뿐 협상 진전에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협상의 조기타결을 통한 정국의 불확실성 제거보다는 영남 세력 위무, 야당 압박 등 정략적 고려를 앞세운 태도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또 『정당명부제는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이를 애써 부정하고 있는 야당도 문제다. 『협상기술』이라는 설명이지만 정국 투명성 확보의 책임을 나눠지고 있는 거대야당의 성숙된 자세로 보기는 어렵다.
■앞뒤가 뒤바뀐 선거구획정 논의
여야 총무들이 운을 뗀 선거구획정 논의는 초반부터 정치현실을 지나치게 의식, 원칙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의견이 많다. 총무들은 인구하한선을 먼저 정해 선거구 숫자를 확정, 이를 토대로 비례대표 의원수를 정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갈 태세다.
그러나 선거구 획정의 원칙론에서 보면 「의원정수 및 지역구와 비례대표 비율 결정→지역구 숫자 확정→1개 선거구당 평균인구수 산출→헌재의 4대 1 인구편차기준에 의한 인구 상·하한선 설정→선거구 획정」수순이 정석(定石)이다. 그래야만 현역 의원, 정파간 이해관계가 개입될 여지가 적다. 의원들의 반발과 정당간 득실차이 등 현실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개혁」다짐과는 상충되는 접근법이다.
■당리당략·기득권
선거구획정에는 당리당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있다. 한나라당이 「인구 하한선 8만5,000명, 상한선 29만7,500명」안을 낸 게 대표적인 경우. 이렇게 하면 텃밭인 부산의 지역구 감소폭이 1개로 최소화하기 때문이다. 반면 인구수편차 4대 1을 적용, 인구상한선을 34만명으로 하면 부산에선 4개의 선거구가 없어진다.
비례대표 의석을 가급적 많이 늘리려는 여당의 계산도 뻔하다. 『정당명부제로 지역당구조를 깨려면 비례대표 의석이 많아야 한다』는 논리지만 취약지역인 영남 의석을 가급적 많이 얻으려는 정치적 의도를 부인하기 어렵다.
■15대 게리맨더링
시정에는 관심없는 여야 정치권이 15대 총선 당시 담합했던 「게리맨더링」을 바로잡는데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우선 15대 총선 당시 지역구 의원 숫자를 가급적 늘리기 위해 『1개 구·시·군과 다른 구·시·군의 일부를 합해 선거구를 만들 수 없다』는 법조항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2인 선출구로 만든 선거구들의 원상 회복 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고 있다. 부산 북·강서와 해운대·기장, 인천 계양·강화, 전남 목포·신안이 이 범주에 속한다.
도·농통합지역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2인 선출구로 만들어 놓았던 지역들을 1인 선출구로 바로잡자는 데에는 의견이 접근돼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의원, 지역주민들의 반발을 의식해 쉬쉬하고 있다.
■전문가 견해
서울대 정치학과 황수익(黃秀益)교수는 『여야의 제도 개혁이 무원칙하고 목표도 불분명하다』면서 『총선을 직전에 두고 각 당의 이해관계가 분명한 상태에서 선거제도 개혁협상을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비판했다. 황교수는 『여야가 진정으로 공정한 룰에 합의 하려면 정기국회 초반에라도 전문가들의 의견 등을 참고, 숙의 했어야 했다』면서 『제도개혁의 원칙과 목표가 없는 상태에서의 협상은 안하는 것만 못하다』고 지적했다.
신효섭기자
h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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