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권선언기념일이라고 달력에 적혀 있다. 12월 10일, 바로 오늘이다.세계인권선언기념일이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51년 전에 유엔총회가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 것을 기억하는 날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마치 요즘 저물어가는 한 해를 두고 한 세기가 저문다거나 한 천년기가 저문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 대해 무슨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달력 한 장을 넘기는 무심한 세월보내기로 치면 바로 오늘이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이든, 바로 요즘이 새 밀레니엄의 대전야이든 무슨 특별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무심할 수만은 없는 것이 세상 일인 듯하다. 특히 밀레니엄을 두고는 온 세상이 온갖 의미와 기념물과 행사와 거품과 허세와 과열로 떠들썩하다. 하다못해 2000년 첫 해돋이를 동해안에서 맞이하려는 자동차의 말못할 혼잡을 신문들은 일찍부터 걱정해 주고 있다.
정말로 걱정스러운 것은 이런 들뜸이고 날뜀이고 부풀리기이다. 의미를 부여하고 기념물을 세우고 행사를 벌이는 일은 나쁠 것이 없다. 다만 현실을 과장하거나 근거없이 희망을 색칠하는 허세는 자제해야 한다.
정부는 정부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하고 국민은 국민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하되 평상심으로 해내는 성숙한 모습이라야 아름답다.
세계인권선언일인 것은 우연이지만, 「무슨 특별한 일」이 있기는 있다. 오늘 오후 2시 서울 서초동의 변호사회관에서는 「사형폐지에 관한 특별법 입법촉구 결의대회」가 급히 열린다.
주최는 천주교,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불교조계종 등의 인권관련 위원회들이고 주관은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다.
이들은 결의문을 통해 ①국회는 현재 의원발의로 추진중인 사형폐지에 관한 특별법안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시켜줄 것 ②정부는 현재 50여명에 이르는 미집행 사형수를 연내 감형해 줄 것 ③사법부는 시대역행적이고 반문화적인 사형선고를 자제해 줄 것 ④정치지도자들은 이 기회에 정치적 결단을 내려서 사형제도를 폐지할 것 등을 촉구하게 된다.
국회에서 의원발의로 사형폐지특별법안이 추진되는 것과, 정부의 밀레니엄 대사면 계획안에 현재의 사형수들에 대한 무기징역형으로의 감형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 이들의 「특별한 모임」이 급히 열리게 된 까닭이다.
지난 6월4일 러시아가 합류함으로써 전 세계의 사형제도 폐지국은 모두 106개국으로 늘었다고 한다. 사형제도 존치국가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89개국이어서 폐지국이 훨씬 더 많아졌다.
『사형제도에 관한 논쟁은 이제 존치론과 폐지론의 대결이 아니라 폐지론과 시기상조론의 차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한 사람의 생명이 전 지구보다 무겁다』고 하는 인간존중의 인식이 보편화하고 있는 점일 것이다.
현재 미폐지국은 미국의 일부 주를 제외하면 그 전부가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지역과 군사독재국, 저개발국에 집중돼 있다. 「인권국가」가 나라의 명제로 되어있는 우리로서는 떳떳치 않은 일이고, 또 없애지 못할 이유도 없다.
더구나 밀레니엄을 기념하는 하고많은 행사들 중에서 「사형제도 폐지_사형수감형」만큼 무겁고 소중한 의미를 지닌 정신적 이벤트는 찾기 어려운 것이다. 이 부분은 특히 사형제도를 폐지한 선진국들의 거의 전부가 여론의 압력에 의해서라기보다 정치적 리더십에 의한 결단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에 교훈이 있다. 김대중대통령은 그 자신이 한때 사형수였기에 오히려 「결단」이 어려운 것일까.
대통령의 「결단」이나 정치적 리더십이 아쉬운 대목은 사형제도를 포함한 「인권」관련 현안들에 몰려있음도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공교롭게도 세계인권선언과 같은 해에 태어난 국가보안법의 개폐문제는 그 대표적 현안이라고 할 수 있다. 엊그제 공동여당끼리의 정책조율에서도 국보법문제는 다시 무책임방기상태로 내던져졌다는 소식이다.
의문사 진상규명이나 인권위원회 설치등의 개혁입법들이 실종된 현실을 보면서 국민의 정부의 개혁의지에 아직도 기대하는 사람들은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를테면 장준하선생에게 금관문화훈장이 곡절끝에 추서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의 죽음에 얽힌 「의문」은 국민의 정부에서도 그대로 남아 있음이 상징적이다.
득표나 총선에서의 승리는 정당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IMF체제라는 호기를 다 놓쳐버리고 그나마도 득표계산에 희생·실종되는 개혁의지를 두고 역사에서의 승리가 과연 가능하겠는지 생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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