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예술이나 풍자가 공허할 때가 있다. 아무리 영화가 꿈과 환상이라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과 너무나 거리가 먼데. 「넘버3」의 송능한 감독이 2년 3개월 만에 내놓은 옴니버스영화 「세기말」은 끔찍하고 추악하다.1999년 12월의 서울이 끔찍하고, 그것에 마비된 채 사는 인간들이 끔찍하며, 그들을 폭력보다 더 섬뜩한 언어와 영상으로 고발해야 하는 영화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그 끔찍한 현장의 제1장 「모라토리움」. 시나리오 작가 두섭(김갑수)은 「밥」을 위하여 「거짓」을 판다. 재미없는 영화는 국적 관계없이 용서 못하는 영화사들. 그것도 권력이라고 제멋대로 점수를 매기는 평론가. 옆방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여관방은 부실건축의 표본이고, 대낮 그곳을 들락거리는 남녀들에게 부끄러움이란 없다. 술을 먹고 과속, 졸음 운전을 하는 총알택시기사.
제2장 「무도덕」. 셀프카메라에 대고 천(이호재)은 말한다. 『도덕이 돈 되냐』 『지금이 천국이다. 선진국 사절. 제발 이대로』라고.
천민자본가인 그는 여대생 소령(이재은)과 원조교제를 한다. 소령이 받은 커피 묻은 수표는 고시공부한다는 그녀의 오빠가 다시 천의 도박오락실에서 날리고, 다시 돌아 소령과 마약섹스판을 벌이는 오렌지족인 천의 아들 현일 지갑에서 소령에게로 오고. 몸을 팔아서라도 가난을 벗어나겠다는 소령.
물건을 망가뜨러 놓고도 지폐 몇 장 던져주며 오히려 화를 내는 현일을 망치로 죽여버리는 거리에서 요요를 파는 파산한 사내. 『돈 준다. 내 아들 살려줘』라고 울부짖다 소령에게 대뜸 『내 아들 하나만 낳아줘』라고 말하는 천.
제3장 「모럴 해저드」. 대학 시간강사 상우(차승원)는 낮에는 강의실에서 실패한 한국의 100년을 「애비」들의 잘못으로 비판하고는 밤에는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운다. 술에 취해서는 교수임용에 뇌물을 써야 하는 현실을 비난하지만 다음날에는 그 때문에 일이 잘못될까 전전긍긍한다.
애비를 욕하면서 그 애비를 따라가는 위선자, 먹물을 증오하는 야비한 먹물. 제4장 「Y2K」가 와도 그들은 변하지 않는다. 가수 한영애의 「말도 안돼」를 들려주며 『그래도 사람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라는 말은 그래서 지독한 역설이다.
「세기말」은 비겁하지 않다. 직설적이기에 더욱 아프고 무섭다. 그것을 위해 감독은 3개의 이야기와 공간과 등장인물들을 절묘하게 얽혀 놓았고, 이야기마다 각기 다른 영상스타일을 구사했으며 배우들은 현실 속에서 처럼 미친듯이 연기했다. 불행하게도 그것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지금 서울, 우리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이런 「세기말」을 가고 있다.
오락성★★★★ 예술성★★★★ (★5개 만점 ☆은1/2, 한국일보 문화부 평가)
이대현기자
leedh@hk.co.kr
■송능한 감독 인터뷰
그는 칼날을 시퍼렇게 세웠다. 우리의 3류 시스템을 비꼰 「넘버3」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그의 칼날에 자유로울 대한민국 국민은 없다. 송능한(40)감독은 의도와 달리 「넘버3」가 과장된 인물(송강호)의 헝그리정신으로 희화해 소비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 『99년 우리 현실이 코믹성으로 비틀기에는 너무 엉망이지 않느냐』
_감독이 규정하는 「세기말」은?
『거창하게 악마가 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부조리, 불합리, 무변화의 우리 사회 모습이다. 마치 총알택시를 타고 있는 느낌이다. 무슨 사고가 날 지 모르는데 술취해 뒷좌석에 타고 있는 상태. 한번쯤 길옆에 차를 세우고 속도와 목적지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_그 점검의 방식이 어떻게 보면 섬뜩할 정도로 단순하고 폭력적인데….
『표현의 수위문제로 갈등했다. 그러나 우회하기에는 너무 화가 났다. 영화가 항상 현실을 따라가는데 뒤에서 말로 풍자만 하고 있기엔 우리 사회가 너무 폭력적이고 완고하다. 「맞장」을 뜬다고 생각했다. 한번쯤은 필요하다. 영화로 혁명은 안되지만 변화는 가능하다』
_싸울 상대가 너무 많아 4개로 된 옴니버스 양식을 택했나.
『시나리오 때부터 「기승전결이 아닌 구조는 없을까」 생각했다. 결국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한 낭비를 없애고, 단편들을 모아 벽화처럼 시대를 드러내는데는 가장 적합한 형식이라 생각했다』 송감독은 처음에는 계급을 대표하는 5명(먹물, 아줌마, 딴다라, 백수, 천민자본가)의 삶을 다루고 싶었다. 그러다 『자신있고 아는 것만 얘기하자』고 생각을 바꿨다.
_두번째 「무도덕」이 너무나 강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느낌도 든다.
『두번째 이야기는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모순이 천민자본주의에서 파생된 것이다. 인천 호프집 참사처럼 불이 나도 돈은 받아야 된다는 무도덕의 세상. 그런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보통사람과 먹물이 1편과 3편의 주인공들이다. 나도 그중 하나이다. 이 영화는 자기반성이기도 하다』
_「넘버3」의 재미를 기대하는 관객들이 많은데….
『깔깔 웃자고 오면 실망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얘기에 충실했다. 아비가 아닌 아들 세대들이 많이 보고 「후련하다」고 말하면 만족한다. /이대현기자
■소령역 이재은 "경험하지 못한 세계라 더 겁없이 도전"
대담하기에 자유롭다.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영화속 인물의 부도덕성, 혹은 무도덕성에 자기 자신을 결박당할까 두려워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고 무엇보다 거리낄 게 없기 때문이다. 맑아 자유롭다.
배우 이재은(19). 『어떻게 하지 걱정하다가도 슛 사인이 들어오면 어떻게 그렇게 「돌아버리는지」 나도 깜짝 놀랄 정도예요.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 더 겁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스폰지처럼 자유롭게…. 관객을 믿구요』
이재은의 눈빛은 힘이 있다. 그러나 벌써 완급을 조절할 줄 안다. 「노랑머리」에서는 세상에 대해 떼쓰고 고함 지르는 눈빛이었다. 「세기말」의 소령의 눈빛은 다르다. 스무살 여자애에게 돈을 주고 육체를 탐하는 더러운 「애비」들의 수표에 「몸뚱아리」를 팔아 버렸고 동시에 희생당했다. 게다가 몽상가이다. 더욱 가련하다. 이렇게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공허와 공포, 절망이 가득한 눈빛을 보여 주었다. 이호재와의 정사 후, 오렌지족과의 환각 파티 후, 그녀가 보여준 눈빛과 표정 연기는 올해 여배우 연기 중 손꼽힐 만하다.
이런 캐릭터는 그러나 그냥 마음만 먹어 나온 것은 아니다. 다섯살때 「토지」에 서희 역으로 나온 이래 15년의 연기 경력 때문만도 아니다. 『마약하는 장면 때문에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어요. 거기선 배우들에게 다 가르치거든요. 코카인을 하면 심장박동이 빨라져 광분하고, 대마초는 무기력해진다네요. 하지만 소령의 분위기에는 빠른 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마약 후 춤장면에서 흐느적거린 게 마음에 걸려요. 디데일 부분에서 틀린 것이죠』 맡은 역할에 대해선 확실하다.
두 편의 쇼킹한 영화 후 출연섭외가 밀려든다. 그러나 그녀가 결정한 것은 29일부터 한달간 예정된 뮤지컬 「황구도」(최용훈 연출). 동덕여대 방송연예과에 재학중인 그녀는 무슨일이 있어도 공부만은 계속하겠다는 생각이다. 아역 시절 어머니가 들려준 『언젠가 이 자리가 남의 자리가 될 것』이라는 말도 한 이유. 더 큰 이유는 오래토록 연기를 하고 싶고, 그것을 사랑하면서 제대로 하고 싶기 때문이다.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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