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사랑합시다」라는 구호가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전경련 건물이 창설 이후 처음으로 한국노총 소속 노동자들에 의해 기습 점거를 당했다. 물론 이렇다 할 충돌이나 큰 혼란은 없었지만 「전경련 해체」라는 구호나 노동자들에 의한 「회장실 점거」는 그 자체로도 조용한 충격을 던졌다. 노동자들을 화나게 만든 직접 계기는, 전경련 측에서 『노조 편 드는 의원들은 낙선운동을 벌이며, 재계 입장을 수용하는 의원들만 정치자금을 지원할 것』이라며 「정치활동」을 선언한 데 있다.이런 발언의 배경에는 최근 노·사·정 모두에게 「뜨거운 감자」로 등장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문제가 깔려 있다. 한쪽에선 새로운 세기와 새로운 천년을 동시에 맞는다며 고급 호텔에서 2,000만원 짜리 밀레니엄 패키지 상품이 나오고 이미 연말까지 특급호텔 단체행사 예약이 끝날 정도인데, 다른 쪽에선 재계의 「정치활동」 발언과 전임자 임금지급금지 조항 존폐 여부를 둘러싸고 한국의 밀레니엄맞이 겨울이 뜨거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조합 입장에서는 96년말 날치기법대로 2002년부터 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된다면 300명 이하의 노조가 60%를 넘는 현상황에서 재정난으로 사실상 대부분 노조가 문을 닫아야 한다며 우려한다. 노조의 반대 논리는,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법은 외국에도 없는 악법이며 노사 자율 원리를 위배하고 노조 자체를 무력화한다는 것이다.
한국노총은 17일 시한부 총파업투쟁을 예고하며 노사정위 탈퇴도 불사한다는 각오이며, 지난달 합법화한 민주노총은 정기국회가 끝나는 18일까지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매일 「노동시간단축, 개혁입법 쟁취 결의대회」를 가지며 연말경 총파업투쟁에 돌입할 계획이다.
재계에서는 「노조전임자 지급문제에 밀리면 끝장」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인데다가, 여당과 국회가 지나치게 노동계에 끌려다닌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특히 내년 총선을 5개월 정도 앞두고 노동계와 정부측이 사용자측을 「왕따」시키면서 97년 대선 때처럼 공동전선을 펼칠 것이라는 위기감이 강하게 대두되었기에, 3일 경제5단체가 「정치활동 선언」 기자회견까지 열며 맹공을 개시했다. 재계는 「정치위원회」를 설치하여 국회의원들의 노사관계 성향을 분석, 공개함으로써 정치후원금을 차등지급하려는 구상도 갖고 있다.
정부는 노사 합의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고 절충안을 제시하기로 했다. 노동부 노정국과 노사정위원회 모두에서 대책안을 마련하고 있으나 노사 모두를 동시에 만족시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사용자들이 전임자 임금지급시 처벌받는다는 조항이 삭제되는 대신 임금지급 의무가 없음을 규정하거나 전임자 수와 임금액수를 제한할 때 최소한 노동측, 아니면 노사 모두의 저항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 않아도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따뜻해진 겨울을 더 이상하게 달구지 않고 처음 모습으로 되돌릴 묘안은 없을까. 「묘안」은 없지만 세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첫째, 전임자 임금지급 문제를 처음처럼 노사간의 자율 교섭에 내맡기되, 산별 내지 업종별 특수성을 감안하기 위해 산별 교섭을 시도하는 것이다.
둘째, 현재의 노사관계 문제가 전임자 임금 문제로만 환원되는 것이 아닌 만큼, 「삶의 질」 향상 차원에서 고용문제와 노동시간단축, 성평등과 모성보호, 빈부격차, 노동복지 전반에 관한 포괄적 노동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것이다.
셋째,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을 지속적으로 하향평준화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물결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에 걸맞게 노동의 인간화와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새로운 경영경제 원리를 찾아내고 실험해 나가야 한다. 온갖 장애물들이 나타날 것이지만 결코 회피하지 말고 뚫고 나갈 일이다.
강수돌·고려대 교수·노사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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