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년 6월25일, WBA주니어미들급 세계타이틀전이 열린 장충체육관. 15라운드가 끝난후 발표된 점수는 일단 1-1. 한국 부심은 72-69로 도전자 김기수가, 이탈리아 부심은 68-72로 챔피언 벤베누티가 우세하다고 판정했다.승부는 주심 리처드 포프의 몫. 장내아나운서의 멘트가 이어졌다. 『벤베누티 68…』. 순간 관중석에서는 환호가 쏟아졌다. 최초의 한국인 세계챔피언이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때문이었다.
그칠줄 모르는 환호속에 장내아나운서가 『칠십…』이라고 발표하자 체육관은 함성의 도가니에 파묻혔다. 74점이라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끝내 환호에 묻혀버렸다. TV앞에 모여 이 순간을 지켜보던 국민들 또한 이웃집이 떠나갈 정도로 함성을 터뜨렸다.
당시는 1만가구당 1대꼴로 TV보급률이 극히 낮았던 시대였다. 이런 궁핍한 시대에 김기수는 한국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에 등극, 순식간에 국민적 영웅이 됐다.
함흥에서 월남한 가난한 구두닦이 소년출신 김기수가 한국복싱사를 새로 쓴 것이다. 벤베누티는 『당연히 이길 경기이기 때문에 챔피언벨트도 집에 두고 왔다』고 말할 정도로 김기수의 열세가 예상되던 타이틀전이어서 국민들의 기쁨은 더 컸다.
맨주먹 하나로 이룬 김기수의 세계정복은 당시로서는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던져준 「일대 사건」이었다. 더욱이 벤베누티로부터 타이틀을 뺏은 이날은 한국전쟁 발발 16주년이 되던 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가난에 찌들어 있던 한국인들에게 긍지와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김기수의 세계정상 등극에는 그만큼 지불한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벤베누티를 데려와 경기를 치르는데 지불한 개런티만도 5만5,000달러.
당시 쌀 한가마에 6,200원 하던 시절이니 어마어마한 액수다. 벤베누티는 청와대에서 주기로 한 이 돈을 며칠을 기다려서야 받은 뒤 한국을 떠났는데 이는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준다. 김기수는 아마전적이 87승1패를 기록할 정도로 불세출의 복서였다.
또 58년에는 제3회 도쿄아시안게임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아 최고의 주먹으로 자리잡았다. 60년 로마 올림픽 8강전서 벤베누티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 유일한 패배인데 6년뒤 설욕을 했다.
1, 2차 방어전을 잘 치른 김기수는 타이틀획득 1년 11개월만인 68년 5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3차방어전서 이탈리아의 산드로 마징기에게 타이틀을 내주기까지 국민의 우상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한국복싱은 74년 홍수환이 WBA밴텀급, 유재두가 75년 WBA주니어미들급 왕좌에 오르는 등 중흥기를 맞는다.
69년 글러브를 벗은 김기수는 이후 신설동에 도장을 차리고 후진양성에 나서다가 명동에 「챔피언다방」을 열고 빌딩도 구입하는 등 사업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최고의 스타였으면서도 97년 지병인 간암으로 별세하기까지 「피오줌을 싸며 번 돈을 결코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생활태도는 링에 오르는 복싱후배들에게 여전히 귀감이 되고 있다.
박원식기자
par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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