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저물어간다. 누구는 야만의 세기로 불렀다. 전쟁과 기아, 환경파괴로 얼룩진 지난 100년의 문이 닫히고 새 천년이 열린다. 지난 날들이여 안녕, 지구여 안녕하라. 1999년 12월 31일, 밀레니엄 전야, 천년의 경계선을 넘는 그 밤에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가.밀레니엄 이브의 서울 광화문 일대. 구름같이 몰려든 12만명의 인파가 거리를 덮는다. 우리는 태양을 운반한다. 밤 11시, 전북 변산반도에서 불붙여 옮겨온 한반도의 마지막 햇빛이 세종로 이순신 동상 앞 점화대에 다시 뜬다. 1,999개 평화의 연이 날아오르고, 교보빌딩 옥상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우주선이 착륙한다.
11시 59분, 이순신 동상 부근 대형빌딩에 내걸린 초대형 시계추가 새 천년의 초읽기에 들어간다. 드디어 새 천년! 불꽃놀이와 함성에 묻혀 자정을 맞으면 전국의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즈믄동이(밀레니엄 베이비)들의 고고지성이 울려퍼진다.
예술의전당에서는 밤 10시부터 밀레니엄 콘서트가 열린다. 이 음악회는 정명훈이 지휘하는 아시안필하모닉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국내 정상급 성악가 김현주 김영환 최종우 등이 출연한다. 자정부터 연주되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전세계 60여개국으로 위성중계돼 10억 인구가 함께 지켜보게 된다. 우리는 로비에서 와인을 마시며 천 년의 향기를 달콤하게 목으로 넘길 것이다. 자정 30분 뒤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 화려한 불꽃놀이와 브라스밴드의 팡파르가 관객을 맞는다.
다른 극장으로 가보자. 영국 에딘버러에서 세계를 두드린 환퍼포먼스의 사물놀이 음악극 「난타」가 정동극장에서 밀레니엄의 밤을 관통한다. 제2회 변방연극제가 열리고 있는 동숭아트센터는 「나눔의 자리를 통해 경계를 없앤다」는 모토로 2000년을 맞는다. 밤 11시, 배우들이 사물을 치며 관객과 함께 앞마당으로 나간다. 일행은 자정까지 대학로에서 길놀이를 펼친다. 시계 바늘이 새 천년을 가리킬 때 지나는 모든 이에게 맥주를 권하고 음식을 나눠 먹는다.
롯데월드에서는 밤 1시까지 테크노파티가 이어진다. 2000년과 24시간을 상징하는 24개층 2000㎝ 높이의 대형 트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뮤지컬 등 다양한 레퍼토리의 2시간 짜리 공연을 볼 수 있다.
자정에 임진각에서 펼쳐질 백남준의 비디오 퍼포먼스도 전세계로 중계된다. 지구촌의 유일한 분단국가, 반세기 넘게 상처로 남아있는 그 곳에서 백남준은 무당이 되어 한바탕 씻김굿을 벌인다. 죽은 자와 산 자를 위로하는 것이다. 백마디 말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눈물과 회환, 다짐으로 말갛게 눈을 씻고 통일 세상을 기도하자.
천년에서 천년으로 통과하는 시간의 터널을 방송이 놓칠 리 없다. 31일 저녁 6시 30분부터 1월 1일 밤 10시까지, 영국 미국 독일 일본 등 7개국 방송사가 참여하는 「2000 투데이」가 84개국에 생방송된다. 지구를 한바퀴 돌며 77개국이 준비한 밀레니엄 행사를 소개하고 노벨상 수상자들이 일제히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MBC가 참여한다. 20세기의 마지막 일몰, 키리바시섬의 첫 일출, 뉴질랜드에서 태어날 최초의 밀레니엄 베이비, 파리·뉴욕 등 곳곳의 이벤트….
대중가수들이 밀레니엄을 그냥 넘길 리 없다. 「아줌마들의 오빠」 김종환은 31일 밤 11시30분 63빌딩 컨벤션센터에서 공연을 갖는다. 새 음반 「실락원」의 수록곡과 자신의 히트곡 「존재의 이유」 등을 들려준다. 소공동의 호텔롯데 크리스탈볼룸에서는 오후 7시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는 로커 김종서의 공연이 마련된다.
무대에서 맨발로 공연을 해 「맨발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은미는 잠실 롯데월드 크리스탈볼룸에서 오후 9시, 밤 11시 두차례 공연을 갖는다. 「99 그랜드 밀레니엄」이라는 제목이 붙었는데, 흐느적 거리는 재즈와 팝, 그리고 발라드 등 이은미와 몽롱한 새벽을 맞는 관객도 적지 않을 듯.
영화로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 1일 0시 30분부터 서울 피카디리극장에서 첫 상영을 시작한다.
북새통의 혼잡과 흥분, 환호와 열광 뒷편으로 여전히 춥고 고단한 밀레니엄 전야가 있음을 잊지말자. 지하도에서 새우잠을 자는 노숙자들과, 보육원에 버려진 아이들,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녘 동포들, 누운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중증 장애인과, 외로운 노인들, 사경을 헤매는 환자들…. 새 천년의 첫 해가 뜰 때 어디선가는 생명의 빛이 꺼질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남는다. 밀레니엄 이브의 함성은 살아있음에 바치는 송가이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 빛과 어둠의 간격 위에 걸리는 무지개와 같다. 다시 새 천년, 희망을 노래하자.
/오미환기자 mhoh@hk.co.kr
/장병욱기자 aje@hk.co.kr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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