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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 철학 깃든 한폭 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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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 철학 깃든 한폭 산수화

입력
1999.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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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규장각에는 의궤(조선시대 국가행사를 기록한 그림)가 2,500권, 옛지도가 6,000장이나 있다. 한결같이 아름답고 귀중한 자료들이다. 그러나 이 멋진 보물들은 학자들의 연구에 쓰일 뿐 일반인이 만날 길은 거의 없다.영인해서 책을 내면 되겠지만, 길이가 1㎙, 2㎙나 되는 지도를 출판하려면 제작비가 엄청나 일반 상업출판사가 달려들 엄두를 못내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으로 규장각이 직접 발간한 옛지도 영인본은 대원군 시절 제작된 지방지도 중 전라·충청·경기 편이 나왔을 뿐이다. 그것도 비매품으로 연구자와 주요기관에 배포돼 일반 독자의 손이 닿지 않는다. 의궤는 딱 1권, 정조의 결혼준비를 기록한 「영조정순후정조가례도감」이 지난해 민족문화추진회에 의해 번역됐을 뿐이다.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은 국민 모두의 보배여야 할 옛지도들을 일반독자에게 소개하는 반가운 책이다. 규장각을 비롯해 국내 여러 도서관과 박물관이 갖고있는 옛지도 수십장을 싣고,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이모저모를 차근차근 일러준다. 서울대 교수 3명이 옛지도의 발달 과정(한영우), 거기 나타난 세계관(배우성), 옛지도의 회화적 특성(안휘준)을 설명하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국보급 「한국본여지도」에 대한 논문(한영우)을 덧붙였다.

우리 옛지도는 단순히 어디에 무엇이 있다고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의 반영이다. 거기에는 땅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았던 조상들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조선 태조 5년(1396년)에 이첨이 그린 「삼국도」를 설명한 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산맥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철령에 이르러 별안간 솟아오르며 풍악(금강산)이 되었고…원기가 화하여 뭉치고 산이 끝나면 물이 앞을 둘렀으니…』 (이첨의 「삼국도후서」(三國圖後序)에서). 한영우 교수는『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대간(大幹)을 산맥의 대종으로 인식하고, 거기서 흘러내린 물물기를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하나의 생명체로 파악하고자 하는 지도제작 태도는 한국 고지도의 특성을 이루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우리 옛지도는 또한 아름답다. 지도를 만들 때 지리학자, 수학자와 함께 화가가 참여해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지도를 그려냈다. 바다에 물결무늬를 그려넣고 방위에 따라 오방색을 칠해 화면 가득 풍부한 색감을 풀어놨다. 산들은 서로 어깨를 걸고 꿈틀꿈틀 흘러내리고, 도성을 그린 지도에는 계절의 풍치, 건물과 사람, 풍속까지 나타난다.

특히 18세기 진경문화가 꽃피면서 회화식 지도가 크게 발달했다. 이들 옛지도는 현대지도에 비해 정확성은 떨어지지만, 등고선과 위도, 경도로 표시된 현대지도의 메마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입체성과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배우성 교수가 쓴 「옛지도와 세계관」도 매우 흥미롭다. 조선이 접한 최초의 서구식 세계지도는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 17세기 초 이 지도가 중국에서 들어오면서 땅은 평평하고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 믿던 세계관이 깨졌다. 그 충격으로 서구식 세계지도와 동양적 세계관을 결합한,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천하도」가 만들어졌다. 배우성 교수는 천하도의 실체를 규명하면서 조선후기 사상사의 한 흐름을 짚고있다.

이 책을 보면서 못내 안타까운 것은 이처럼 아름다운 옛지도들을 실물로 감상할 수 없는 점이다. 효형출판은 책과 함께 아주 큼직한 옛지도 달력도 내놓아 아쉬움을 달래주고 있다. 한영우 교수는 『이 책에 실린 옛지도는 빙산의 일각』이라며 『이 책은 귀중한 우리 옛지도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박물관과 도서관에 갇혀있는 보배로운 옛문헌들을 우리 곁에 두려면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그는 『의궤나 옛지도를 영인하고 대중화하는 일은 국가사업으로 할 일』이라고 강조한다.

조선의 문화중흥을 이루었던 정조는 지도 제작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왕에게 그려 올린 지도가 조잡하다고 하여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윤범행의 관직을 박탈했을 정도다.

한교수는 『옛지도를 통해 우리 조상들이 국가경영에 얼마나 많은 문화투자를 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밀레니엄 전야, 새 천년을 맞는 온갖 이벤트의 홍수 속에서 이 책은 우리가 꼭 해야할 일을 생각케 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데, 조상이 물려준 보물을 창고에 묵히고만 있으니,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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