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체제는 아직도 불사(不死)의 존재다. 「개별 재벌」들은 일부 퇴출되었지만 「재벌 체제」는 여전히 건재하다. 오히려 강화됐다. 재벌개혁의 목표가 특정그룹의 공중분해가 아닌, 그릇된 재벌구조 자체를 뜯어고치는 것이라면 개혁의 진도는 5부 능선도 넘지 못했다. 「재벌개혁은 이제 시작이다」는 지적이 더 옳다.재벌개혁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와 「국민의 정부」 2년의 일관된 화두였다. 이른바 「5+3」원칙에 따라 곧 부채비율은 200%로 낮춰지고 상호채무보증도 완전해소된다. 사외이사와 소액주주의 권한이 강화됐고, 결합재무제표도 시행된다. 수치목표는 달성했고 선진제도는 어느 정도 구비된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재벌체제는 개혁되었는가. 아니 최소한 개혁되고는 있는 것인가. 대답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한국만의 「재벌체제」는 여전하다. 그룹총수(오너)의 황제식 경영이 대표적이다. 「짐은 곧 국가」라는 봉건주의체제의 개념이 한국의 재벌에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 재벌에 있어 오너는 곧 그룹이다.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4대재벌은 실물부문뿐만아니라 금융부문까지 장악했다. 과거에는 산업자본가로서 자동차 전자 건설 화학 유통 등 실물부문에서는 제왕적 위상을 갖고 있었으나 이제는 은행을 제외한 전 금융권을 석권하고 말았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산업자본이 금융자본까지 장악한 사례는 거의 없다. 앞으로는 정부는 물론이고 자방자치단체도 4대재벌의 협조없이는 정상적인 정책운용이 어렵게 됐다. 대부분의 경제전문가들이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분리하지 않을 경우 국가경제적으로 엄청난 화(禍)를 자초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재벌은 그저 큰 기업이 아니다. 국민경제의 사활을 쥐고 있을 뿐 아니라 의식주에서 문화 스포츠 의료까지 일상생활 전체를 지배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은 개혁되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경제와 국민들의 미래를 오너가 이끄는 낡고 독단적인 재벌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재벌개혁없는 21세기는 희망도 없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회장님 관심사이니 반드시 관철시키시오』
국내 대부분 기업마다 각 사장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그룹총수(오
너)의 뜻」이다. 오너의 사전 결재를 받지 않은 사항은 아예 공식회의에 상정조차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은 각사 사장들이 진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올 4월 현재 국내 30대그룹 총수의 그룹계열사 지분은 평균 2%, 자녀등 특수관계인의 지분까지 포함해도 5.4%에 불과하다. 그러나 수십개의 계열사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프랑스 시사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사태에 접어든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로 한국의 비효율적 재벌체제를 지목한 뒤 『한국 재벌은 종교집단적 성격을 갖고 있고 총수는 황제와 같다』고 비판했다.
주요 그룹별 총수일가의 지분은 현대 5.3% 삼성 2.0% LG 3.7% SK 6.3% 한화 5.3% 금호 2.0% 롯데 5.8% 대림 6.3% 한솔 2.2% 등이다.
보스턴컨설팅 관계자는 『국제통화기금(IMF)체제로 굴지의 한국기업들이 무너졌다』며 『만약 기업내부에 총수의 전횡을 효율적으로 견제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더라면 그같은 무더기 도산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IMF 이후 쓰러진 그룹이 모두 34개에 달한다, 이가운데 30대 재벌그룹에 속하는 기업이 11개에 이르고 있다.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오너의 독단경영이라는 점이다.
물론 오너경영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선진국에서도 창업자나 2세가 직접 경영을 맡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잘 알려진대로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업하고 세계적인 초우량기업으로 육성해 경영하고 있다. 미국의 정보통신업체인 모토로라와 일본의 자동차회사인 도요타 등은 창업자 가족이 경영일선에서 임직원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총수 전횡」논란이 없다. 이사회가 경영진을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사외이사들은「자료요구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업 총수들이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때는 곧바로 견제하게 된다. 오너든 전문경영인이든 정확한 시장전망과 자금조달방안을 토대로 이사회를 설득하지 못할 경우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수 없다.
정부는 대기업에 사외이사를 50%이상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총수들의 전횡을 견제한다는 방침이지만 재벌기업들은 총수나 경영진과 선이 닿는 인사들로 사외이사를 채운다는 대응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벌써부터 사외이사제가 유명무실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전성인(全聖寅)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사외이사들에게 자료요구권등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한편 이사회의 결정사항에 대해 개인적으로 법적 책임까지 지도록 해야만 총수전횡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성철(全聖喆·국제변호사)부드러운사회연구원장은『우리나라 기업체의 이사회는 모두 회장의 결정사항을 추인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며『이사회가 능력이 떨어지는 총수를 교체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정착됐을 때 재벌개혁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정규기자
j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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