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외교: 동북아 평화구도로의 전환제1공화국이 수립된 후 60년대 말까지 약 20년 동안은 냉전의 논리에 충실하여 북방과의 관계설정을 거부한 시기였다. 한국과 북방과의 관계는 70년대에 들어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북방정책이 싹텄다.
69년 닉슨 행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미국은 세계정책 전반을 변화시켰다. 71년에 주한미군의 3분의1을 감축했으며,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줄여 나갔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불신은 크게 자라났다.
85년 출범한 소련의 고르바초프 체제는 과감한 대내 개혁 정책과 적극적인 대외 개방 정책을 추진했으며, 미국과 중국이 여기에 호응함으로써 국제정치는 「새로운 긴장완화의 시대」를 맞게 됐다. 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북방의 공산국가들로 하여금 한국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또 한국의 경제발전과 기업 및 상품의 공산권 진출은 한국이 북방정책을 추구해 나갔을 때 공산권이 큰 어려움 없이 한국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한국인들은 자신감을 갖게됐으며 이제까지 닫혀있던 세계로 활발히 진출하고 남북통일을 달성해야겠다는 소명의식을 갖게 됐다.
북방정책의 이념적 기조를 이루었던 기본원칙은 첫째 북한의 고립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과, 둘째 대북한정책 및 통일정책과 연계시킨다는 것, 셋째 정치적 교류와 비정치적 교류를 과감하게 병행추진 한다는 것, 넷째 국민적 합의의 바탕위에서 추진한다는 것, 다섯째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과의 기존의 유대 관계를 바탕으로 추진해 나간다는 것 등이었다.
■한·소수교: 한국 북방외교와 소련 신사고외교의 접목
한·소 수교는 한반도 주변의 거대한 지각변동을 단적으로 가시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국이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의 한 당사자로 지난 48년간 적대시해 온 소련과 외교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음을 실증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북방외교의 종착점, 즉 중·소를 통해 북한을 개방사회로 끌어낸다는 최종목표에 거의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소수교는 북한을 비롯한 중국, 일본등 주변국가들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북한은 45년간 동맹 관계를 맺어온 소련이 한국을 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체제논리의 모순에 빠지게 됐다. 북한은 최대동맹국인 소련과 한국의 수교로 인해 그동안 체제를 유지시켜온 「하나의 조선」이라는 논리에 위협을 느끼게 됐다.
또한 북한은 폐쇄정책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감을 더욱 느끼게 됐으며 이는 경제난과 함께 체제유지에 대한 불안감으로 작용했다. 한·소수교가 예상보다 빨리 이뤄진 배경에는 소련의 탈냉전적 사고와 내부 경제난의 가속, 그리고 한국의 적극적인 북방외교 노력이 작용했다.
■남북 동시 유엔가입: 국제적 지위 향상, 남북 상호간 상대방 인정
유엔의 승인을 받아 탄생한 한국외교의 최우선 목표는 유엔 회원국이 되는 것이었다. 한국은 49년 4차 유엔총회때부터 유엔가입을 시도했으나 번번히 소련의 거부권행사로 좌절됐다. 한국은 80년대들어 북한의 유엔가입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며 유엔 가입에 유리한 국제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강화하고 유엔의 각종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동안 한국은 세계 148개국과, 북한은 108개국과 수교했으며 한국은 세계 10대 교역국으로 성장했으나 남북한 모두 옵서버석에 머물러야 했다. 한국의 유엔가입은 바로 이같은 불합리하고 부자연스런 국제적 위상이 본질적으로 수정되었다는데서 우선 역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실질적인 유엔가입 의미는 유엔 무대에서의 자격변화라는 상징성을 뛰어넘는 역사적 이벤트이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물론 냉전의 마지막 지대인 남북한이 나란히 정회원국이 됐다는 사실에 있으며 이와 함께 시기적으로 세계질서가 새롭게 개편되면서 유엔의 역할과 기능이 크게 강화돼 가고 있는 시점에 유엔가입이 이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남북한의 유엔가입은 한반도 및 동북아에 엄청난 엄청난 도전과 기회를 주는 전기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남북한 유엔가입의 보편적 의미로서는 첫째 남북관계의 정상화, 둘째 국제적 지위 향상도모, 셋째 대외관계의 새로운 발판마련, 넷째 동북아 질서개편에의 능동적 참여 등을 들 수 있다.
■한·중 수교: 동북아 냉전 잔재의 청산
한국의 대중국 외교정책은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7·7 선언」에서 중국 및 사회주의권과 관계개선을 추진한다고 약속했다. 양국의 교류는 90년에 들어와 제도화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북한과 군사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이 서서히 「두 개의 한국론」으로 기울고 있었다. 또 중국은 한국의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안을 지지하여 북한을 설득, 남북한 동시가입의 길을 열기도 했다.
한국과 중국의 외교관계 수립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먼저 한·중수교는 양국이 지난 수십년 동안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호혜·평등에 입각한 선린협력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또한 한·중 수교는 동북아 정세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한·중수교는 북한과 미국, 일본 관계의 정상화를 유도하게 될 것이므로 한반도 평화정착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한·중 수교는 한·러 수교 및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과 더불어 한국의 주체적인 외교노력의 산물이었고 또 한국외교의 다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병용(兪炳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대학원 교수
-약력
서울 문리대 사학과졸, 런던경제대학원(LSE) 및 모스크바 외교대학원 수료(정치학박사)
버클리대 및 옥스퍼드대 초빙교수, 한국현대사연구회 회장, 근현대사연구소 소장
-저서
「한국문제와 영국의 외교정책」(모스크바대, 98년) 「1960년대의 대외관계와 남북한문제」(공저, 백산서당, 99년) 「한국현대정치사」(집문당, 97년) 「한국현대사와 민족주의」(집문당, 96년) 「증언사입문」(역서, 한울, 95년) 등
-연구자료
박치영 「유엔정치와 한국문제」(서울대출판부, 95년)
김동성 「신동북아 질서와 한중정치 협력」(중국연구 1-1, 93년)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한소관계의 새로운 인식」(91년)
외무부 「남북한 유엔가입문제에 관한 보고」(91년)
세종연구소, 「소련의 한반도 관계 자료집」(세종연구소, 91년)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한국 북방관계의 정치외교사적 재조명」(90년)
외무부, 「한국의 북방외교」(90년)
이홍구, 「한국의 통일정책과 북방외교」(전경련, 88년)
劉金質, 「當代中韓關係」( 中國社會科學出版社, 98년)
유병용, 「韓國的北方政策和對中國外交」(中國社會科學院 當代韓國八期, 95년)
Lee, Chae-Jin, China and Korea:Dynamic Relations (Stanford Univ., 96년)
White, Stephen, Development in Russian & Post-Soviet Politics. (Duke Univ., 94년)
■ 한-소 수교 주역 최호중 前외무
90년 9월 외무부장관으로서 한-소 수교를 성사시킨 주역이었던 최호중 세종재단 이사는 "한-소 수교는 그 전 45년간 지속된 양국의 비정상관계를 청산, 한반도가 탈냉전의 세계조류에 동참하게 됐음을 선언한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헝가리와의 수교로 싹을 틔운 북방외교가 한-소 수교로 그 결실을 맺음으로써 우리 외교의 지평을 서방세계 중심에서 전세계를 상대로 한 전방위 외교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최전장관은 "한-소 수교는 당시 정부가 끊임없이 추진해온 북방정책과 소련의 개혁, 개방정책의 결실이었다"며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고 말했다.
1990년은 한-소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 한해였다. 최 전장관은 그해 6월 미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 9월 뉴욕 한,소 수교 서명, 그리고 12월 노태우 대통령의 소련 공식방문으로 이어진 외교 역정을 최근 발간한 그의 저서 '빛바랜 영광 속에 후회는 없다'에서 '한-소 수교의 3장(章)'이라 적고있다.
"아직 외교관계가 없는 한국과 소련의 국가 원수가 만난다는 소식은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우리에겐 외교적 승리였지만 자기식 사회주의를 고집하며 세계 조류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던 북한에겐 엄청남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북한은 같은 해 11월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하는 등 외교적 몸부림을 쳤지만 이미 터진 한-소 수교의 물꼬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최 전장관은 그해 9월 30일(우리시간 10월 1일) 유엔본부 안보이사회 부속실에서 세바르드나제 소련외무장관과 수교협상을 담판짓던 때가 '한-소 수교의 3장'중 가장 어려웠던 때라고 회고한다.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에서 양국간 국교수립엔 원칙적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수교의 발효시기에 대해선 우리측이 '즉시발효'를 주장한 반면 소련측은 북한과의 입장을 고려, 91년 1월 1일 발효를 완강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최 전장관은 이날 세계아동기금 주관으로 아동문제에 관한 세계정상회담이 열리는데 착안, "새해에 새출발을 하자"는 세바르드나제 장관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고 한다. "미래의 동량인 아동들을 위한 세계정상회담이 열린 듯깊은 이날 정식국교를 맺도록 하자"는 설득이 주효했는지, 소련 외무장관은 공동 코뮈니케의 수교일자를 91년 1월 1일에서 90년 9월 30일로 즉석에서 정정함으로써 한-소간 새시대가 열리게 됐음을 선포했다.
최 전장관은 "지금 세계는 21세기 새로운 질서를 앞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며 "국내 문제에만 매달리지 말고 세계의 큰 흐름에 눈을 돌려야 할"라고 말했다.
/김승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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