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원에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어찌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었겠는가…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조선시대 영조가 뒤주에 갇혀 비운의 생을 마감한 아들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문이 250년만에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2월 이달의 문화재 전시품목 중 하나로 영조의 「어제 사도세자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을 1일 공개했다.
68년 이종만씨에게 기증받아 보관해오던 이 묘지문에서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것이 정말 아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훈육하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며 아들의 죽음을 원통해 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글로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글이 조선왕조실록 등에 전해오고 있으나 영조가 직접 쓴 묘지문은 처음 발견됐다. 그런 만큼 이 묘지문은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역할과 관련, 중요한 단서로 평가된다.
영조는 묘지문에서 『세자는 총명해 조선의 성군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성인을 배우지 아니하고 거꾸로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웠더라…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면서 아들을 뒤주에 가두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또 『아까운 바는 그 자질이니… 오호라 이는 누구의 허물인고 하니 짐이 교도를 하지 못한 소치일진대 어찌 너에게 허물이 있겠는가? 』라며 자신을 질책하고 있다.
또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구술하노라』라고 비통한 마음을 토로하고 있다.
이 묘지문은 가로 16.7㎝, 세로 21.8㎝ 사각형 청화백자 5장에 쓰여져 있으며 작성일자는 영조 38년(1762) 7월로 적혀있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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