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은 늙지도 않아」. 신파조의 무슨 유행가 가사 같은 제목의 비교적 짤막한 장편을 소설가 이경자(51)씨가 발표했다. 왜 정은 늙지도 않는가.강원도 방축골에 사는 도철이란 청년이 있다. 소문난 한량인데 전 부인이 죽은지 1년도 안돼, 대를 이으라는 집안의 성화에 열일곱 처녀 필례에게 장가를 든다. 둘은 첫눈에 서로에게 반한다. 속궁합이 너무도 잘 맞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가 안생긴다. 필례는 대를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자신이 수많은 첩을 직접 들인다.
그래도 아이는 안생기고, 부부의 금슬은 깊어만 간다. 26년이 흘러 필례는 숫처녀를 들이면 아이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딸뻘의 열일곱 절름발이 처녀 영실을 다시 첩으로 들인다. 석달이 넘도록 태기가 없자 필례는 영실에게 갖은 구박을 다 하고, 영실은 집을 나간다. 8년 후(이때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다), 도철은 영실을 찾아 다시 살림을 차린다.
도철이 나이 예순, 필례가 쉰일곱이 되었을 때 마침내 아들을 얻는다. 필례는 자신이 없어지면 도철이 편안해질 것이라는 생각에 제초제를 마시고, 영실은 필례가 끝까지 자신을 몹쓸 사람으로 만든다며 장례를 치러준다.
요즘 세상에 읽기에는 청승맞은 이야기다. 그러나 작가가 이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인간사 인연의 끈은 참으로 질기디 질기다. 세 남녀의 뒤엉킨 만남, 악연과 애증이 얽힌 인연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삶의 진실에 닿아있는듯 느껴진다. 『사람이 나이를 먹다 보니 인연이 보인다. 인간에 삶에 있어 생명의 힘이라 할 수 있는 인연이 제도적인 가치와 도덕 때문에 억압받는 현실을 세 사람의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 작가의 말이다.
작가 특유의 강원도 사투리 섞은 구수한 문체, 특히 거침없는 욕설을 동원한 대화는 읽는 맛을 더한다. 도철이 죽은 필례를 그리는 마지막 대목에서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참 좋은 정이었어. 정이 좋아 하늘도 시샘해 자식도 주지 않았으니, 이승의 삶은 짧은 꿈에 지나지 않으니』
/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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