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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는 지금 '세기말'

입력
1999.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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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가족·도덕·성...세기말. 한국영화가 그곳을 지나가는 우리의 자화상을 그린다.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무엇으로 사는가. 가족은? 도덕은? 성(性)은?

영화 「세기말」의 송능한 감독은 『세기말은 형용사나 수사가 아니다. 그 자체의 고유 의미로 1999년, 오늘의 서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순한 시간의 분할이 아니라 「어느날, 어느곳」이란 시공간이다. 세기말의 불안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아니라 「현실」이다. 할리우드가 종교적 말세론이나 악령의 지배, 컴퓨터문명의 공포에 시달린다면, 우리 영화는 그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영혼을 잠식할 만큼 불안한 해체와 상실」에 대한 고발이다.

◆세기말의 모자이크

아주 웃기고 아주 우울하다. 「넘버3」의 송능한이 바라보는 지금 이곳의 삶이다. 그 단편들을 모아 하나의 벽화를 만들면 그것이 「세기말」(12월 11일 개봉)이다. 민중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휴지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시나리오 작가 두섭(김갑수)의 무능은 꿈의 상실이다. 여관방에서 끙끙대며 쓴 멜로드라마 대본이 컴퓨터바이러스에 의해 모두 지워질 때 그는 자기 삶이 유예상태임을 깨닫는다.

『돈이면 불가능은 없다』며 여대생 소령(이재은)과 원조교재하는, 아들과 삼각관계가 되는 천(이호재)은 천민자본주의의 얼굴이다. 그 천박한 자본에 편안히 의지하면서 소령은 현실 인식을 거부한다. 마약과 추락의 자화상.

그 천민자본가의 아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길거리 요요장사의 폭력은 극에서 극을 향한 분노이자, 다른 극으로 편입하려는 자기파괴적인 욕망이다. 시간강사 상우(차승원)의 위선과 도덕적 타락. 우리의 세기말은 이렇게 나열되고 영화는 그것이 모여 하나의 모자이크를 이룬다.

◆세기말의 화두 「성」, 그리고 살인과 유희

한국 영화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세기말의 인간은 타락한다. 그리고 그 타락의 시작과 끝은 성(性)』이라고. 상업적 효과를 위해 어디든 갖다붙이는 편한 말이기도 하다. 이때의 성은 강렬하고 자극적이다. 도덕적 기준을 이탈한다. 억압과 자유의 상징이자 기존가치에 대한 회의로 정의한다.

그 자체가 지금 우리의 솔직한 정서인지도 모른다.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12월 11일 개봉)는 바로 그 불안과 욕망의 정서를 「삼각 치정극」이란 틀에 담았다. 그 삼각 속에 모든 것이 흔들린다. IMF 사태로 인한 은행원 서민기(최민식)의 실업은 가부장적 권위를 흔들고, 그의 아내인 30대 초반의 어린이영어학원 원장 최보라(전도연)의 불륜은 가족해체의 위기를 맞게 한다. 그리고 최보라와 밀회를 즐기는 김일범(주진모)의 집착은 사랑을 소유의 욕망으로 타락시킨다. 그들의 세기말은 아슬아슬한 관계유지이다.

「삼양동 정육점」(11월 27일 개봉)에 오면 『사랑의 덫에 걸렸다』는 5명의 남녀를 만난다. 그들은 「세기말」을 무슨 주문처럼 외치며 절대 고독의 도피수단으로 섹스에 매달리고, 그 모습을 은밀히 엿본다. 그래도 상대를 느낄수 없어 몸부림친다. 세기말에는 틀이 필요없다. 코미디, 스릴러, 미스터리, 멜로를 뒤섞은 잡종영화 「신혼여행(身魂旅行)」(감독 나홍균). 그 속에 일곱 쌍의 신혼부부도 성과 타락, 살인과 복수로 얽히고 신(身)과 혼(魂)이 만난다.

그 영혼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감독 김태용·민규동)에 오면 아이들을 전염시킨다. 귀신은 더 이상 한(恨)이나 부조리의 고발자가 아니다. 귀신은 세기말 우리의 내면에 숨어있는 공포를 자극하는 매개체이다.

◆세기말의 끝은?

한국 영화가 포착하는 우리의 세기말은 이처럼 타락하고 불안하고 혼란스럽지만, 그러나 그 끝은 결코 파멸이 아니다. 「세기말」은 두섭이 꿈꾸던 「20세기 사회비판을 담은 연쇄살인극」 시나리오를 쓰는 것으로 「희망」을 붙잡고, 「해피엔드」는 서로 다른 꿈들이 가닥을 잡아가고, 「삼양동 정육점」은 죽음으로 순수를 되찾는다.

그리고 나면 새 천년 벽두(2000년 1-2월 개봉예정)에 한국 영화는 「박하사탕」(감독 이창동) 과 「인터뷰」(감독 변혁) 「춘향전」(감독 임권택)이 순수와 진실과 참된 사랑을 이야기 한다. 지금 한국 영화는 세기말이란 요란스런 「통과의례」를 치르고 있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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