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 칼라」들이 짐을 싸고 있다. 화이트칼라(사무직) 블루칼라(생산직)에 대비해 골드칼라로 불리는 첨단기술분야의 연구원들이 국제통화기금(IMF)체제 2년동안 실험실을 대거 이탈했다. 「첨단기술의 메카」이자 「한국의 싱크탱크」인 대덕연구단지는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IMF체제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연구실에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있었다.연구원들의 의욕도 대단했다. 한 관계자는 『IMF체제로 가장 많은 타격을 받은 곳이 연구·개발(R&D)분야』라며 『민간기업은 물론이고 공기업,심지어는 국가기관까지 R&D를 「거품」으로 착각, 연구소를 폐쇄하거나 대거 축소했다』고 말했다. 그는 『「불꺼진 연구단지」를 보면 한국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강조했다.
IMF체제 2년동안 한국의 과학기술경쟁력이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 스위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경영개발원(IMD)은 한국의 과학기술부문 경쟁력이 IMF체제를 계기로 중국에 뒤지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겉으로만 요란한 구조조정에 밀려 국가의 두뇌기능발달이 정지되고만 것이다.
대덕연구단지의 경우 작년 한햇동안 3,000여명(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추정)의 골드칼라가 직장을 떠났다. 여기에는 전자통신연구원(500여명) 한국과학기술원(106명) 원자력연구소(244명) 생명공학연구소(41명) 에너지기술연구소(63명) 등 기초과학분야 연구원들이 포함돼 있다. 30년 가까이 쌓아올려진 「대덕」의 명성이 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민간기업 기술파트의 골드칼라들은 미국 대만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 외국경쟁업체에 스카우트되어 국경을 넘어갔다. 미래의 부(富)가 대거 유출된 것이다. 일본 소니사가 95년 3,000억엔의 순손실을 보면서도 연구·개발비를 증액,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정성기(鄭盛基) 포항공대 총장은 『R&D는 형편이 되면 늘리고 안되면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지금은 IMF전에 만들어 놓은 기술로 먹고 살고 있지만 21세기에는 과연 어떤 산업과 기술로 국부를 쌓아야 할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짐싸는 '골드 칼라'
IMF의 지원과 정부의 막대한 재정투입으로 경기는 화려하게 「재기」했지만 우리 경제의 「두뇌 기능」은 마비되고 「성장의 엔진」은 식어버렸다. 전문가들은 2년간의 국가적 연구공백을 메우려면 5-10년은 걸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먹고 살」 기술이 없어졌다는 얘기다.
산업기술진흥협회에 따르면 작년말 현재 우리나라의 연구개발(R&D) 인력은 7만7,440명. 97년말보다 7,178명이 줄었다. 대기업의 R&D투자액도 1조3,270억원(14.9%)이 줄었고 올해도 97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됐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가 시작되면서 기업들은 먼저 기술연구소부터 메스를 들이댔다. 매출 감소와 같은 당장의 외상(外傷)은 없기 때문이다. 거리로 내몰린 연구원들 사이에는 외국진출 붐이 일었고 아예 전업을 하는 석·박사들이 상당수에 달했다.
직장을 떠난 연구원들은 외국기업의 집중적인 스카우트 대상이 됐다. LG반도체의 경우 20여명의 「램버스 D램」 설계인력이 대만과 말레이시아 반도체 업체로 자리를 옮겼고, 일부 이동통신업체 연구원들은 미국과 베트남의 경쟁업체로 옮겨가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기술을 유출하는데 일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헤드헌트업계 관계자는 『경력 10년정도인 선임연구원의 연봉이 3,000만-3,500만원 수준인데 해외 경쟁업체에 가면 1억2,000만원(10만달러)을 받을 수 있다』며 『R&D투자를 경시하는 통토에서는 외국기업의 파격적인 제의를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분야의 경우 「D램」의 호황 사이클은 2-3년 후면 끝나고 「비메모리」분야가 부상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은 오직 D램 하나로 버티고 있고, 마이크로프로세서나 주문형반도체 등 「비메모리 분야」에서는 여전히 후진국 수준이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IMF체제 2년은 연구개발에 대한 집중적 투자가 요구되는 부품산업에 가장 큰 타격을 줬다. 부품산업의 대외의존도가 더욱 높아졌다. 특히 장기간 투자가 요구되는 첨단부품 개발이 중단되면서 앞으로 우리나라 제품의 경쟁력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지적이다.
반도체 관련 산업의 경우 올해 1-7월 10억8,000만달러의 대일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97년 10억3,100만달러의 적자액을 훨씬 상회할 전망이다. 기술개발에 대한 집중적 투자없이 남의 나라 장비와 부품으로 생산하다보니 수출이 늘어날 수록 수입도 덩달아 늘어난 것이다. 우리나라는 작년 총 170억달러치의 반도체를 수출했지만 실리콘웨이퍼, 다이오드트랜지스터 등 핵심 반도체 부품을 122억달러나 수입했다. 총 수출액의 70%에 이른다.
자동차 부품도 마찬가지다. 올해 자동차 부품의 대일 적자액(1-7월 2억1,800만달러)도 97년 수준(3억8,900만달러)을 넘어설 전망이다. 특히 수입비중이 절반을 넘는 엔진과 트랜스미션, 센서 등의 핵심부품에 대한 개발이 IMF체제로 연기되면서 이같은 「부품 종속」은 더욱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수출품목으로 떠오른 휴대폰도 생산원가 250달러중 140달러를 부품 수입비용과 특허료 명목으로 미국으로 새나가고 있다.
산업연구원(KIET) 조철연구위원은 『기업들이 연구인력과 프로젝트에 대해 조급하게 구조조정을 하면서 신소재나 첨단부품에 대한 개발이 상당부분 중단됐다』며 『이결과 핵심 부품의 대외의존도는 더욱 심해지고 제품 경쟁력에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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