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서갑숙의 에세이가 한 차례 열병처럼 한국 사회를 휘젓고 지나간다. 여성이 성(性)의 문제를, 그것도 공개적이면서 조금은 에로틱한 수법으로 이야기할 때 한국은 야단법석이다. 그가 아무리 「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나를 둘러싼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을 뿐」이었고 「여성과 남성의 성생활을 달리 보는 불공평한 시각을 바로잡았으면 하는 생각」이라 해도.17일 수학능력평가시험장. 올해라고 예외가 있을까. 수험장 바깥에서 눈을 감고 몇 시간 동안 서서 기도를 올리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어김없이 발견한다. 밤 12시에 들어오는 자식을 기다렸다가 다음날, 아침 챙겨먹이고 도시락 싸주기 위해 새벽 4시면 천근 같은 몸을 일으키는 어머니들. 그래서 고3의 1년 동안 적어도 한두 번은 병원 신세를 지는 어머니들.
문화관광부가 11월의 문화인물로 뽑은 사람은 400년 전 안동 땅의 후덕한 부인 안동 장씨다. 아버지의 명을 따라 한 번 상처한 남자에게 처녀로 혼인한 무남독녀.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행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 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아들」을 키워 이조판서가 되게 하고 시가와 친가의 가세를 일으킨 사람.
세기말 한국 여성을 둘러싼 풍경은 이렇다. 여성을 옥죄는 금기와 억압을 깨겠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 한편에서 자식교육을 위한 여성의 자기 희생 또한 지칠 줄 모른다. 정부는 유교사회에서 자식을 출세시키고 가문을 융성케 한 여성을 귀감 삼을 인물로 꼽고 있다. 21세기를 눈 앞에 둔 자리에서 한국 여성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모성의 담론과 현실」은 여성사회학자 모임인 성과사회연구회가 5년 동안 만나고 토론하면서 연구한 결과를 모은 논문집이다. 여성주의나 여성의 현실을 살피는 적지 않은 연구활동이 있고, 또 수다한 책들이 있는데 특별히 이 책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러저러하게 분산되어 있던 「모성(母性)」이라는 매력적인 주제를 한 자리에 모았기 때문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대학원을 거쳐간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다양한 나이의 여성 사회학자들은 94년부터 「우리가 이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두고 긴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이 책에서 3부로 나뉘어 소개되어 있다. 서구 페미니즘이 제기한 모성이론의 여러 쟁점과 역사 배경 나아가 한국의 모성 담론에 대한 논의가 한 축을 이룬다. 한국과 일본의 모성 현실을 정책과 법에 관련해 살핀 글들이 또 다른 한 장을 차지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일상생활과 대중매체에 나타난 모성을 살핀다.
책은 16명의 필자들이 여기저기 발표했던 글을 조금씩 손질해서 실었다. 이런 식의 논문집이 대개 그렇듯 일정한 주제로 가닥을 잡았다손치더라도 주제가 일관성을 가지고 매끄럽게 진행하지 않는 흠을 발견할 수는 있다. 정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논지의 강약이 다른 점도 눈에 띈다.
성과사회연구회는 「현대사회는 여성들에게 자녀의 복지냐, 어머니의 권리냐라는 식의 이분법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다」는 현실 인식을 갖고 있다. 이연정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연구원은 그래서 지금 한국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집단이 자녀를 위한 최소한의 모성보호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가난한 어머니 자녀를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과감하게 때로는 무모하게 투자하는 어머니 누군가에게 자녀를 맡긴 채 끊임없이 불안해 하는 어머니 자녀가 다 자란 후 인생의 무상함에 빠져버린 어머니 등 인생주기와 계급 위치, 그리고 취업 여부에 따라 분열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모성 이데올로기로 아이들을 돌보고 함께 지내는 것이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을 은폐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비판했다.
여성에게서 모성을 기대하지 않을 경우도 문제는 적지 않다. 이정옥 효성가톨릭대 교수는 여성노동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나타난 「슈퍼우먼 신드롬」이 전통적인 모성의 의무에서 벗어난 여성을 직장일과 가정일의 이중고에 시달리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모성과 충돌하는 또 하나의 현상은 여성의 성적 욕망이다. 그는 『여성들의 성억압에 대한 대항방식의 하나는 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고 주장하는 것』이라며 『여성들은 그것을 권력에 대한 저항의 도구 또는 억압적인 가족에 대한 대응의 소재, 그리고 자신의 자아를 확인할 수 있는 매개물로 이해한다』고 분석했다.
김현숙(서울산업대 강사) 김수진(서울시립대 강사)씨는 이러한 모성 이데올로기가 일으키는 갈등을 「미워도 다시 한 번」 「안개 기둥」 「고스트 맘마」 등 영화들에서 다시 확인하고 있다. 대입 수험생 어머니나 일하는 어머니를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모성성과 내면의 갈등을 확인한 심영희 한양대 교수의 글도 마찬가지다.
이 책이 모성의 올바른 모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성이 서야할 마땅한 자리를 시원스럽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한국 여성들이 어떤 얼굴에 어떤 자세로 이 땅에 서 있는지를 전체로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글을 숙고하면서 토론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여성 뿐 아니라 남성의 몫이기도 하다.
장병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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