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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세상에서 가장 값진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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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세상에서 가장 값진 선물

입력
1999.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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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얼추 끝나갑니다. 밀과 보리, 호밀 씨앗을 뿌리면 이제 겨울맞이 채비를 해야합니다. 저희 공동체에 일손을 도우러 오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엊그제는 멀리서 울산지역 노동자들이 여덟시간 밤길을 달려 새벽에 도착해서 좁은 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소와 염소 먹일 꼴을 베고 통 타작을 하고 다시 일요일 오후에 먼길을 떠났습니다.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해서 힘드는 일을 해야하는데 그 먼길을 오고 간 정성이 눈물겹습니다.일거리가 트이지 않은 데다 일손까지 서툴러 올해 농사는 손님 농사였습니다. 그래도 다섯해째 고집스럽게 제초제 농약 화학비료없이 저희가 만든 퇴비로만 농사를 짓는 걸 하늘이 갸륵하게 여기신 덕인지 감자 마늘 밀 참깨 고구마 콩 벼 농사가 여느 해보다 잘 되었습니다. 땅이 되살아난 증거가 아닌가 합니다.

일손을 도와주신 손님들에게 무엇인가 보답하고 싶은데 그동안 경제자급이 안되어 마음뿐, 무엇하나 제대로 손에 들려 보낸 게 없습니다. 어쩌다 감자나 고구마 캘 때를 맞추어 오신 분들께 감자 고구마 몇톨, 감 따서 곶감 깍는 일 도와주신 분들께 감 몇알 나누어 드리는게 고작이었습니다.

올해는 식구들끼리 의논을 했습니다. 오래 머물러 식구처럼 지낸 분들에게는 이홉들이 참기름 한병, 고구마 한상자, 쌀 20 kg씩 드리자고요, 그리고 여러해에 걸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께는 저희가 유기농으로 농사지은 쌀을 일반미 값만 받고 보내드리자고 했습니다.

실제로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다 보면 일품이 몇곱절이나 더 들기 때문에 제 값을 받으려면 농작물도 거기에 맞추어 내야 합니다. 그러자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일반서민이 그 비싼 값을 치르고 청정한 농산물을 맛볼 엄두나 내겠느냐고요.

하루 빨리 일품 덜 드는 유기농 방법을 찾아내서 적어도 주곡만은 일반 시중가로 공급해서 웃돈을 얹지 않더라도 서민들이 먹을 수 있게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그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웃돈을 더 받자니 여러모로 꺼림칙합니다.

이 농작물이 어느 입에 들어갈지 뻔하거든요. 생각다못해 인근의 유기농가에 양해를 얻어 우리가 여기 뿌리내리고 살 수 있게 도와주신 분들 중심으로 쌀부터 일반미값으로 드리기로 했는데 저희가 따져보아도 이것은 임시방편이지 문제의 근본해결방법은 아닙니다.

식량 걱정이 절박하기로는 가난한 이웃들이 먼저입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이 필요하기도 이분들이 먼저입니다. 못 먹고 못 입고 과로하다 보면 맨먼저 건강을 해치는 분들이니까요.

이 분들 밥상에 저희가 애써 지은 농산물이 오르는 게 바른 순서인데, 그 차례를 밟자니 저희 생활이 안됩니다. 이래저래 농촌에 있거나 도시에 있거나 아직은 가난한 이들이 살기 힘겨운 세상입니다. 마음은 있어도 몸이 따르지 않으니 가슴앓이가 더 커집니다.

거저 주고 거저 받는 게 베품과 나눔의 기초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받아보아서 압니다. 한여름 뙤악볕에서 힘겹게 일하고 나서 허기가 들때 어느날 나무 그늘에 집에서 정성들여 손수 만들었음이 분명한 약밥이 한석짝 담긴 채 놓여 있습니다. 올해로 이태째입니다.

이분이 어디 사시는지 모릅니다. 주소라도 알면 이제 거두는 철이 되었으니 고구마 몇뿌리라도 보답하고 싶은데 그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때 맛본 고마움이 힘이 되어 어려움을 이겨내게 합니다. 돈이 매개되면 베풀어도 기쁜 마음이 생기지 않고 받아도 고마운 줄 모릅니다. 그래서 가장 값진 선물은 돈 없는 사람들이 딸흘려 가꾸고 빚어낸 것을 서로 주고 받는게 아닌가 합니다. 저는 뒤늦게 풋내기 농사꾼이 되어 비로소 이 즐거움과 고마움을 배우고 있습니다.

/윤구병·철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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