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전거를 위한 프롤로프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강물이 생사가 명멸하는 시간 속을 흐르면서 낡은 시간의 흔적을 물 위에 남기지 않듯이, 자전거를 저어갈 때 2만5,000분의 1 지도 위에 머리카락처럼 표기된 지방도, 우마차로, 소로, 임도, 등산로들은 몸 속으로 흘러들어와서 몸 밖으로 흘러나간다. 흘러오고 흘러가는 길 위에서 몸은 한없이 열리고, 열려진 몸이 다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은 낡은 시간의 몸이 아니고 생사가 명멸하는 현재의 몸이다. 이끄는 몸과 이끌리는 몸이 현재의 몸 속에서 합쳐지면서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고, 가려는 몸과 가지 못하는 몸이 화해하는 저녁 무렵의 산속 오르막 길 위에서 자전거는 멈춘다. 그 나아감과 멈춤이 오직 한 몸의 일이어서, 자전거는 땅 위의 일엽편주처럼 외롭고 새롭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자동차가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자전거는 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바퀴를 굴리는 몸은 체인이 매개하는 구동축을 따라서 길 위로 퍼져나간다. 몸 앞의 길이 몸 안의 길로 흘러들어왔다가 몸 뒤의 길로 빠져나갈 때, 바퀴를 굴려서 가는 사람은 몸이 곧 길임을 안다. 길은 저무는 산맥의 어둠 속으로 풀려서 사라지고, 기진한 몸을 길 위에 누일 때, 몸은 억압없고 적의없는 순결한 몸이다. 그 몸이 세상에 갓태어난 어린 아기처럼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길 앞에서 곤히 잠든다.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나서 돌아다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오르막을 오를 때 기어를 낮추면 다리에 걸리는 힘은 잘게 쪼개져서 분산된다. 자전거는 힘을 집중시켜서 힘든 고개를 넘어가지 않고, 힘을 쪼개가면서 힘든 고개를 넘어간다. 집중된 힘을 폭발시켜 가면서 고개를 넘지 못하고 분산된 힘을 겨우겨우 잇대어 가면서 고개를 넘는다. 1단 기어는 고개의 가파름을 잘게 부수어 사람의 몸 속으로 밀어넣고, 바퀴를 굴려서 가는 사람의 몸이 그 쪼개진 힘들을 일련의 흐름으로 연결시켜서 길 위로 흘려보낸다.
1단 기어의 힘은 어린애 팔목처럼 부드럽고 연약해서 바퀴를 굴리는 다리는 헛발질을 하는 것처럼 안스럽고, 동력은 풍문처럼 아득히 멀어져서 목마른 바퀴는 쓰러질듯 비틀거리는데, 가장 완강한 가파름을 가장 연약한 힘으로 쓰다듬어가며 자전거는 구비구비 산맥 속을 돌아서 마루턱에 닿는다.
그러므로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을 오를 때, 길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 올 뿐 아니라 기어의 톱니까지도 몸 안으로 흘러들어 온다. 내 몸이 나의 기어인 것이다. 오르막에서, 땀에 젖은 등판과 터질듯한 심장과 허파는 바퀴와 길로 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땅에 들러붙어서, 그것들은 함께 가거나, 함께 쓰러진다.
「신비」라는 말은 머뭇거려지지만, 지진한 삶 속에도 신비는 있다.
오르막길 체인의 끊어질듯한 마디마디에서, 기어의 톱니 속에서, 뒷바퀴 구동축 베어링 속에서, 생의 신비는 반짝이면서 부서지고 새롭게 태어나서 흐르고 구른다.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가을빛 쏟아지는 태백산맥을 넘어 남대천으로
이 자전거는 강원도 인제군과 양양군의 접경마을인 양양군 서면에서 출발한다. 여기는 해발고도 400㎙이다. 사진가 강운구와 그의 후배인 프리렌서 사진기자 이강빈이 동행했다. 이 자전거는 여기서부터 미천골을 구비구비 우회하는 산림도로를 따라 남진하면서 태백산맥에 쏟아져내리는 가을의 빛 속으로 들어간다. 이 자전거는 해발 1,100㎙ 고지에서 태백산맥을 넘게 될 것이고, 그 꼭대기에서 부터는 내리막과 오르막을 수없이 헤쳐나가면서 동진한다. 그리고 산맥 저편 마을에서 부터는, 살아서 돌아온 연어 떼들 우글거리는 남대천의 물줄기를 바싹 끼고 달려서 이윽고 동해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흰 자작나무 숲에 내리는 가을의 빛과 산간마을들의 삶의 기쁨과 슬픔속으로 바퀴를 굴려서 나아간다.
출발 전에, 자전거를 엎어놓고 닦고 조이고 기름쳤다. 서울서 가지고 온 장비들을 현지에서 출발 전에 버리고 또 버렸다. 수리공구 한개가 모자라도 산 속에서 오도가도 못할 테지만, 장비가 무거우면 그 또한 오도가도 못한다.
스패너 뭉치와 드라이버 세트와 공기펌프와 고무풀은 얼마나 사랑스런 원수덩어리인가. 몸으로 살 수밖에 없을진대, 장비가 있어야만 몸을 살릴 수 있고, 장비가 없어야만 몸이 나아 갈 수 있다. 출발전에, 장비를 하나씩 점검해서 배낭에서 빼 버릴때, 몸이 느끼는 두려움은 정직하다. 배낭이 무거워야 살 수 있지만, 배낭이 가벼워야 갈 수 있다.
그러니 이 무거움과 가벼움은 결국 같은 것인가. 같은 것이 왜 반대인가. 출발 전에 장비를 하나씩 빼 버릴 때 삶은 혼자서 조용히 웃을 수 밖에 없는 비애이며 모순이다. 몸이 그 가벼움과 무거움,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짊어지고 바퀴를 굴려 오르막을 오른다.
빛 속으로 들어가면 빛은 더 먼 곳으로 물러가는 것이어서 빛 속에선 빛을 만질 수 없었고 태백산맥의 가을 빛은 다만 먼 그리움으로서만 반짝였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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