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평가」 붐이 일고 있다.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시민들 사이에서도 평가작업이 활발하다. 환영할 일이다. 「가까운 과거」의 객관적 평가란 어렵기는 해도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고 미래의 방향을 잡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작업이다.현재의 평가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라는 두 축을 따라 움직인다. 옹호론자들은 박정희가 비전과 결단력을 지닌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 「하면 된다」는 의식을 고취시키고, 수출주도의 산업화를 성공시켰다고 본다. 이들은 유신시대의 억압을 외면하거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당시의 경제성장 때문에 우리는 현재 민주주의를 누리게 되었다는 주장도 편다. 비판자들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었음을 인정하지만 그 의의를 낮게 평가하면서, 그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민주세력을 탄압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유린하는 등 산업화의 궁극적 목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했다고 말한다.
요컨대 평가는 경제성장이 우선이냐 민주가치가 우선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대다수 사람은 두 가지 주장을 각각 인정하는 양시론을 편다. 경제성장의 공로도 있었고, 인권탄압의 죄도 있었다고 받아들이며 인권탄압이 없었더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비현실적이다. 급속한 경제성장이 강압적인 정치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올바른 평가를 위해선 엄밀한 논리의 잣대가 필요하다.
애석하게도 박정희 「개인」이 근대화의 아버지인가 혹은 독재자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선 박정희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다. 올바른 박정희 평가는 「박정희 체제」의 역사적 성격을 묻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주한 미 대사관 문정관이었던 그레고리 핸더슨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박정희가 역사상 독특한 존재임을 지적한다. 계급적인 권력기반이 없이 「사소한」 쟁점을 갖고 파벌싸움을 벌여 온 한국의 양반 정치인과 박정희는 확실히 달랐다. 빈농출신으로 엘리트 일본군 교육을 받은 목표지향형 인물인 그는 군을 권력의 토대로 삼아 전통적 파벌싸움을 없애고, 관료집단과 재벌집단을 동원해서 전투를 수행하듯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그의 체제는 중앙의 통제를 통한 통치를 특징으로 한다.
정치에는 중앙정보부와 공화당을, 경제에는 경제기획원을, 군대에는 방첩대(후일의 보안사)를, 관료기구에는 기획조정실을 설치하여 중앙통제를 통해 그의 목표를 실현해 나갔다. 대외적으로는 반공의 첨병임을 자임하며 미국의 지원을 얻고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이끌어 나갔다. 이 새롭게 재편된 권위주의 체제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산업화가 추진되었다. 혹자는 쿠데타가 없었더라면 장면 정부도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하나, 이는 박정희 「체제」의 독특함을 역사적으로 검토하지 않은 주장이다.
70년대초 3선제한이란 민주제도가 더욱 강력해진 중앙의 힘에 걸림돌이 되자 박정희는 유신이라는 새 체제를 만든다. 잘 알려져 있듯이, 70년대의 중화학 공업화는 유신없이는 실행하기 어려웠다. 유신하에서의 경제개발과 민주탄압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박정희 체제는 80년대에 들어 수정과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체제의 해체는 냉전과 국제 경제질서의 변화를 반영하지만 무엇보다도 광주항쟁과 학생 등 민주세력의 대두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래도 중앙의 통제를 통한 통치라는 인식은 90년대에도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재경원의 강한 기업통제, 기업의 정부의존, 정보기관의 정치관여 및 언론통제, 상의하달에 의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정부부처 등. IMF 국난이 멀리 보면 박정희 체제의 유산인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박정희 추모자에 의해 시작된 「박정희 평가」를 「박정희 체제의 평가」로 대체하여 지속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아직도 그가 세운 체제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새 시대에 맞는 제도 혁신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
/이영철 여수대교수·행정학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