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9일로 꼭 10년이지만 통일독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독일 은행협회가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 국민의 85%는 「통일은 옳은 결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동독인(90%)은 서독인(83%)보다 통일을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인구 2만6,000명의 동·서독 접경도시 헬름스테트에서 만난 상점 주인이나 직장인, 대학생은 대체로 통일이후 변화한 삶의 양식에 만족하고 있었다. 옛 국경검문소 앞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동독 출신 40대 여주인은 『통일이 된 뒤 생활수준이 높아져 좋다』며 『동독시절 하지못했던 여행도 자주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독인은 아직도 심리적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동독인의 70%가 자신을 「2등 국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동·서독간의 보이지않는 차별의식이 심각한 수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서독인을 「베시」(Wessi), 동독인을 「오시」(Ossi)로 구분하는 차별의식의 밑바닥에는 실업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실제로 실업자의 33%는 과거의 동독체제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직업의 보유 여부가 동독인의 통일에 대한 견해를 가르는 잣대인 셈이다.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96년 15.5%를 기록한뒤 매년 상승, 올해 17.5%를 넘어섰다. 동독지역이 독일 전체에서 차지하는 교역 점유율도 4.8%대로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노동생산성은 과거 서독에 비하면 60%에 불과하다. 생산성이 떨어져 기업이 채산을 맞추지못하게 되자 기업주는 동독 출신 노동자를 기피,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 할 기술도 없고 교육도 받지못한 50대 이상의 동독인은 특히 심한 정체성의 위기에 빠져있다.
『우리는 사회주의 시절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국가의 배급으로 살 수 있었다. 빈부의 격차도 없었고 상대적 박탈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로 바뀌면서 너무나 많은 선택을 해야 했다. 동독인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준비도 돼있지 않았고 적응속도도 느렸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원인을 발견해 고칠 줄 몰랐고 기다리는데 익숙해 있었다. 자연히 일자리를 얻기가 어려웠다』 식당에서 만난 60대 노인의 말이다. 독일 사회에 「장벽을 도로 쌓아 올리자」「그때가 좋았다」는 「오스텔기」(동쪽을 의미하는 「오스트」와 향수병을 뜻하는 「노스텔기」의 합성어) 현상이 만연하고 있는 것도 자본주의 적응에 실패한 동독인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서독인도 불만이 없지않다. 부담해야 할 통일비용이 너무 많기때문이다. 서독인 1인이 지금까지 부담한 동독 재건비용은 약 2만4,000마르크(1,560만원)에 달한다. 동독인을 위한 조세부담이 많아졌지만 사회보장 수준은 오히려 낮아졌다.
서독인은 저소득층이며 교육수준이 낮은 동독인을 은근히 무시하고 또 동독인은 서독인 의사가 있는 병원은 찾지않을 정도로 동서간의 지역 대립은 심화하고 있다. 이같은 동·서독의 불균형 확대와 높아가는 실업률, 차별의식은 급기야 정치쟁점으로까지 등장,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이 연속 패배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40여년을 다른 체제와 이념속에서 살아온 동·서독이 완전한 통합을 이루기에는 10년의 세월이 너무 짧아 보인다.
/헬름스테트=이창민특파원cmlee@hk.co.kr
■고르비 회견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이 가능했던 가장 큰 요인은 선택의 자유였다』고 회고했다. 고르바초프는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에 앞서 7일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신디케이트를 통해 배포되는 「글로벌 포인트 뷰」와 가진 인터뷰에서 『소련 국민이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경험하고 있을때 어떻게 탱크를 보내고 혁명을 분쇄하는 일이 가능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소련 내부에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자유의 물결이 넘치는 마당에 인접국에 자유를 거부하는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며 『독일 국민 스스로가 자유의사로 통일을 요망하는데 저지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자 민중이 힘을 모아 냉전 종식을 가속화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공산체제는 자유와 경쟁을 부정하는 내재 모순때문에 무너졌다』고 밝히면서도 『자유경제 체제도 빈부·세대 대립의 벽을 늦기전에 허물지않으면 몰락의 전철을 되풀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헬무트 콜 전 독일총리는 7일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고르바초프가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와 동독 비밀정보기관인 슈타지 대신 자신을 믿어줬기때문에 역사의 가능했다』고 고르바초프의 당시 판단을 평가했다. 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KGB와 슈타지가 민중 봉기를 우려하고 소련에 탱크 파견을 원했지만 고르바초프는 「민중이 소련과 충돌하기를 원치않으며 상황은 평화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내 말을 믿었다』며 『그렇지않았다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콜은 『당시 고르바초프와 전화통화를 할 수 없어 보좌관을 통해 긴급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급박했던 순간을 전했다.
김병찬기자
b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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