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막 수립한 이스라엘 법원에 한 건의 재심사건이 접수됐다. 「피고인 나자렛 예수. 나이 33세. 직업 전직은 목수 지금은 무직. 죄명 신성모독죄, 반역죄. 공소사실 자칭 하느님의 아들로 행세하면서 무리를 끌고다니며 사술(詐術)로 이적(異蹟)을 행하고 제사장과 성전(聖殿)을 함부로 비난하는 등 하느님을 모독하며 동시에 유대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해방자인 양 혹세무민하여 대로마황제에 반역한 자임」.제국주의 로마가 식민지 이스라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린 사형 심판을 다시 재판하도록 요청하는 소장이었다. 서기 33년. 유월절 축제를 하루 앞두고 체포된 예수는 24시간의, 재판이라기보다는 즉결 처분을 거쳐 사형당했다. 지금보면 완전한 불법이며 무효로 돌려야야 재판에 가깝다.
난감했던 이스라엘 최고 재판소는 고민 끝에 67년 결론을 내렸다. 예수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 되 그 재판은 로마의 계승 국가인 이탈리아에서 할 것. 결국 체면은 살리면서 소송은 기각해 버렸다.
현실이 소설보다 더 극적이라는 점을 법정만큼 잘 보여주는 곳도 드물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기기묘묘한 사건과 공방이 언제라도 벌어지는 곳이 법정이고, 수많은 비극과 희극의 장면들, 정의와 불의, 진실과 허위, 무고와 희생, 억압과 저항이 불꽃튀는 각축을 벌이는 자리가 바로 재판장이다.
참여연대 사무처장 박원순 변호사가 쓴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는 법정이 얼마나 큰 불의의 현장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재판의 현장을 추적한 책이다. 책의 제목은 왕위계승과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영국의 헨리 8세와 왕을 등에 업고 권세를 휘두르던 크롬웰에 맞선 토머스 모어가 도끼로 머리를 잘리기 직전 했다는 전설처럼 전하는 말이다.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이 수재는 20대에 하원의원이 되고 30대 추밀원 의원, 40대 하원의장을 거쳐 50세에 대법관에 올랐지만 부당한 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런던탑에 갇혔다가 참수당하기 전 사형집행관에게 조용히 말했다. 『자네 일을 하는데 두려워하지 말게. 내 목은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독배를 마시고 죽은 소크라테스, 프랑스의 성녀 잔다르크, 관습에 저항했던 갈릴레이 등의 재판과 외설과 예술의 시비를 불러 일으켰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로렌스, 인류의 양심을 시험했던 드레퓌스 등의 재판이 소개돼있다. 100만 중세 여성들을 화형대 위로 몰아갔던 마녀재판도 한 장을 차지한다.
지은이는 90년대 초 영국과 미국 유학 시절 모았던 사료와 연구서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정의 생생한 증언과 갑론을박을 흥미진진하게 엿보게 만들고 있다. 읽는 이를 사뭇 감동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은 사건마다 보여주는 「위인」들의 태도다.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진실을 지켰던 사람들의 논리정연하고 용기있는 발언,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자들이 역사에 어떤 오명을 남기고 퇴장했는지까지 추적할 수 있다.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지은이의 글 솜씨도 책 읽는 맛을 더 했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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