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 맞은편 작은 골목길. 곳곳에서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린 「이상한」 것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바로 그라피티(Graffiti)라고 불리는 작품들이다.「낙서그림」이라고나 할까. 그라피티는 호프집이나 카페 심지어 분식집의 벽, 주차장, 스케이트보드장, PC방, 각종 문화상품 매장, 터널 등 도심 곳곳에 「그냥」 존재한다. 시간을 내거나 특별한 지식과 교양이 있어야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한강시민공원으로 들어서는 지하차도 동굴에서도 만날 수 있다. 원색으로 수놓아진 스프레이의 물결은 회색 벽 사이에서 오히려 따뜻한 인간미마저 느끼게 한다.
■ 낙서이길 거부한다
그라피티가 점점 많아진다. 60년대 뉴욕의 빈민가에서 시작된 그라피티. 건물 외벽이나 지하철 역사에 아무렇게나 그리거나 쓴 낙서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지금 그라피티는 더이상 뒷골목의 저급한 낙서로 남아있길 거부한다. 그라피티를 표현의 수단으로, 당당한 예술작품으로 인식하고 창작하는 젊은 작가와 그룹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의 작품은 압구정동, 신천역 부근, 신촌, 홍익대입구, 노량진 등 젊음이 모이는 대부분의 장소에 존재한다.
그라피티를 새로운 문화적 스타일로 만들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3~4년 전부터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회색빛 콘크리트 벽면에 표출되면서 시작했다. 최근 이들 가운데 몇몇이 VAF(Vandal's Art Factory)라는 이름을 내걸고 아예 프로로 나섰다. 전문적인 그라피티 회사로는 처음이다.
■ 힙합과 그라피티, 90년대 젊음의 문화
젊은 창작그룹과 젊은이들이 그라피티에 열광하는 이유, 그것은 그들이 힙합문화에 열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유와 해방의 이미지, 제약없는 발산과 표현, 자기만의 세계에 대한 몰입 등은 그라피티가 몇몇 마니아들의 영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적 스타일로 퍼져가는 이유다.
90년대 젊음의 문화가 힙합(Hip-hop)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라피티는 힙합문화의 한 구성요소다. 올 여름 가요계에 춤바람을 불러일으켰던 9인조 힙합그룹 피플크루는 『힙합은 특정 음악이나 춤이 아니라 문화』라며 『랩, 리믹스 디제잉, 춤, 그라피티까지 골고루 갖췄다』고 말한다.
그라피티가 점차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힙합산업인 힙합바나 힙합의류매장, 술집, 카페, PC방 등의 인테리어 개념으로 시작되면서부터다. 아직까지 예술행위라 이름붙이기에는 일반의 거부감이 있는 게 현실이다. 기성작가군에서도 거의 그라피티 작업을 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라피티가 점점 양지로 나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 낙서와 그라피티
그라피티의 가장 초보적이고 자연스런 수단은 낙서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에 가면 「X월 X일, OO와 00, 사랑을 약속하다」 식의 신변잡기에서부터 인생철학, 정치적 주장까지 다양한 낙서들을 볼 수 있다.
「낙서금지」가 80년대까지의 문화풍경이라면 지금은 낙서가 장려되는 분위기다. 대학가 카페 등의 벽면에는 온통 낙서가 가득하다. 주인은 낙서 공간을 만들어주고 낙서하라고 권한다. 파출소 외벽에 낙서그림이 등장하는 등 관공서의 생각도 조금 바뀌었다. 건축공사장의 가림막이나 고가도로, 교각의 외벽에도 그림이 등장하고 있다.
낙서가 공식적인 공간을 얻게되자 역설적으로 더이상 저항의 표출이라는, 조금은 부담스러운 지위를 갖지 않아도 되었다. 「당당하게」그러나 「은밀하게」 낙서하기의 딜레마라고나 할까.
■ 그라피티의 과제
예술이냐 낙서냐의 낡은 질문 대신 『그라피티는 문화 스타일』이라는 주장을 펴는 이들에게는 결코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 놓여 있다. 그라피티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사회성(Social Word)의 실현. 이들은 『그라피티란 작업 자체가 반사회적인 「도둑그림」의 성격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개인감정을 표출하는 것보다 비판정신에 더 가치를 두는 작가정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생산과 소비의 간격을 극복하고 작업공간을 확보하는 것, 「한국적」 그라피티라 불릴 수 있는 독창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라피티가 한 예술장르로서 독립하기 위해 거쳐야 할 문제들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그래피티란] 스프레이 페인트 이용한 낙서끼 있는 그림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는 그라피티는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한 낙서끼있는 그림이나 문자를 말한다.
현대적 의미의 그라피티는 60년대 후반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흑인 젊은이들이 뉴욕의 브롱크스를 중심으로 건물벽이나 지하철 차량 등에 스프레이와 페인트로 구호와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됐다. 이후 흑인 특유의 즉흥성과 직접적인 대면 접촉을 중시하는 힙합(hip-hop)문화와 결합했다.
초기 추세는 인종주의, 고립, 흑백차별, 환경오염, 정체성 상실 같은 슬픈 문화에 뿌리를 두었지만 최근 작품들은 신변잡기적인 부분에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라피티는 80년대를 거치면서 「뒷골목 범죄자들의 낙서」로 폄하되던 지위를 벗고 유럽과 미국 도시들에서 친숙한 거리미술로 사랑받게 되었다. 97년에 국내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작년에는 일대기가 영화화했던 미국태생의 세계적인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는 사모(SAMO)라는 이니셜로 뉴욕의 벽에다 낙서를 하고 다닌 천재적 낙서화가로 많은 그라피티 작품을 남겼다. 이외에도 키스 헤링, 장 뒤 뷔페 등이 이 분야의 대표적 화가들.
국내의 경우는 아직 많지 않다. 갤러리 현대의 아트디렉터 박규형씨는 『박서보, 황창배, 장석원씨 등이 그라피티를 그린 작가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면서 『박서보씨의 초기 작품은 서체로 칠판에 낙서한 것 같은 그림들』 이라고 말했다.
송영주기자
yjsong@hk.co.kr
■[인터뷰] "표현의 자유로움이 그라피티의 정신"
그라피티 전문회사 VAF 대표 강태우(28)
-그라피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어려서 이태원에 살아서인지 스프레이로 그려진 낙서가 그다지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라피티가 담고 있는 표현의 자유로움이 가장 큰 매력이다』 _그라피티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것은?
『사실적인 묘사와 무거운 주제의 반사회적인 메시지에 국한되지 않고 개인적인 사상과 주제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비판정신과 함께 자유로운 느낌의 표현이다』
-카페, 화장실 등의 낙서문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표현의 기교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하찮게 보이겠지만 표현의 자유로움이란 측면에선 그라피티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관공서나 기업 등에서 도시 미관을 위해 그리는 벽화에 대해서는?
『안하는 것보단 낫다. 하지만 정말 잘 그리든지 아니면 그냥 두는 게 더 낫겠다. 우리같은 사람들은 판판하고 커다란 벽에 별로인 그림이 있으면 꼭 성형수술을 망친 여자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앞으로 어떤 작업계획을 갖고 있는가?
『관공서의 협조를 얻어 꾸준하게 작업해오고 있는 작가들과 함께 버려진 한강 둔치의 음울한 벽들에 색을 입히고 표정을 넣는 밀레니엄 작업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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