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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 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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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 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입력
1999.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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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붙은 쟁의87년 7월 5일 울산의 현대엔진 노조 결성은 노동자 대투쟁의 서막이었다. 쟁의는 울산에서 시작돼 부산·마산 등 영남의 남동공업지역으로 확산됐고, 8월 이후는 수도권을 비롯한 거의 전국에서 발생했다. 대투쟁의 진원지였던 울산·마산·창원 지역은 70년대 중반이후 본격화된 중화학 공업화를 상징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조선, 자동차, 기계 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밀집한 한국의 대표적인 공업단지였고, 거친 노동에 종사하는 남성 노동자들이 밀집한 곳이었다. 이들 지역은 주로 대규모 사업장이 밀집했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작업장은 현대그룹 산하의 사업장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듯이 군대식의 가부장적인 노동통제가 노동자들의 숨통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87년 이전에는 대중적인 노동쟁의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 근대적 임노동자의 최대규모 저항운동

87년 7-9월 3개월동안 전국적으로 발생한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한국에서 근대적인 임금노동자가 형성된 이후 발생한 최대 규모의 집단적인 저항운동이었다. 총 참가인원은 122만명으로 당시 상용근로자 10인 이상 사업체 노동자 333만명 중 37%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3개월 동안 발생한 총 쟁의는 3,311건으로 하루 평균 30여건을 넘어서고 있고, 특히 8월에는 하루 평균 83건 꼴로 쟁의가 발생했다.

이것은 7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 발생한 쟁의의 총 건수를 합친 것보다 많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주로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 등에 집중되고 있으나 과거와 달리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비판과 노동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의 요구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울산의 현대 그룹 산하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보면 두발자유화, 부당한 인사이동 금지, 일반사원과 동일한 직업훈련, 생산량 가중 억제, 연장근무 철폐, 공해환경시설 설치, 식당개선 등 군대식 노동통제 완화와 작업장 민주화, 노동자에 대한 차별대우의 철폐를 요구하는 내용도 많이 포함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민주노조 결성으로의 발전

한편 7-9월 대투쟁에서는 이러한 요구들이 민주노조의 결성으로 발전됐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대투쟁에 참가한 사업체 중에서 노조 조직화에 성공한 사업장은 1,770개로 전체의 약 55%에 해당했다.

80년 신군부의 등장 이후 87년 6.29 이전까지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노조결성은 극도로 억제된 분위기 속에서 현대엔진이 민주노조를 결성, 노동자들이 직접 위원장을 선출하고 회사 측과 교섭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역사적 성과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당시의 전국단위 공식 노조였던 한국노총이 자주적인 노조결성에 미온적이거나 심지어는 사용자와 정부의 편을 든 사실을 알고 한국노총의 해체를 요구하기도 했다.

대투쟁이 이렇듯 3개월 정도 기간에 압축적으로 발생하고, 9월 중순 이후에는 급격히 수그러 든 이유는 한국의 억압적 노동통제 상황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8월 28일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의 장례식에 경찰력 투입, 현대중공업과 대우자동차에 경찰력 투입, 9월 5일의 긴급 국무회의 등을 계기로 쟁의는 급격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추후에도 지속적으로 노조결성을 이루어냈고, 그 이듬해에는 이러한 열기를 모아 노동법 개정운동에 나섰으며,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결성 작업을 거친 후 90년 1월 한국노총과는 별도의 새로운 전국단위 노조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 대투쟁의 의미와 한계

60년대 이후 전개된 한국식 개발독재 하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가장 전면적이고 집단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대투쟁은 70-80년대의 재벌주도의 공업화가 낳은 사회적 모순의 표출이었으며, 6월 항쟁에서 분출된 정치적 민주화의 요구가 작업장의 민주화로 심화, 확대되는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대규모 사업장 남성 노동자가 투쟁의 전면에 나섬으로써 저학력 여성 노동자로 대표되던 70년대식의 사회의 동정과 여론에 호소했던 방어적인 노동운동이 이제 생산자로의 자부심과 계급으로서의 자각에 기초한 사회운동, 이익집단 운동 혹은 노동자계급 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 대투쟁은 여러가지 한계도 갖고 있었다. 우선 쟁의의 격렬성에 비해 노동자들의 구호는 대단히 온건했으며, 자기 사업장에서 해결돼야 할 문제에는 크게 관심을 보였으나 사업장 밖의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했다.

이 결과 노동자들은 노조결성이라는 성과를 얻어내기는 했으나 노조의 생존과 발전을 좌우하는 보다 근원적인 환경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함으로써 87년 직선제로 실시된 대통령선거, 88년 노동법 개정운동 등에서 제도적,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 결과 90년대 중반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기업별 노조의 관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노조활동은 이제 상식이 되고 있으나 노동자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은 여전히 미미한 편인데 이는 87년 대투쟁의 성과와 한계가 오늘의 노동운동을 크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자투쟁 이렇게 시작됐다

87년 7, 8월 노동자 투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현대엔진 노동조합의 결성이었

다.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 101명은 울산시내에 모여 노조를 결성, 위원장으로 지금은 여권의 신당창당추진위원이 된 권용목을 선출했다. 이 날이 한국노동운동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역사적 사건의 첫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치 못했다.

다음날 울산시청 사회과에 노조 설립신고를 내고, 노조 결성대회를 가지자 1,000여명의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결성 6일만에 1,500여명이 노동자들이 노조 가입서를 낸다.

현대 엔진의 노조결성 소식은 조금씩 노동조합과 자신의 권리에 눈을 뜨기 시작하던 노동자에게 신선한 자극제였고 용기를 심어준 계기였다. 7월 15일 현대미포 조선소 노조에 이어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 정공노동조합들이 잇달아 결성됐다. 울산에서 터진 투쟁은 마산, 창원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울산이 노동자투쟁의 진원지였던 이유는 병영적 노동체제 아래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공업노동자들의 밀집지역이었고,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조직적 움직이 꾸준히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현대 엔진에는 80년대 초반부터 고적답사반이란 취미모임이 있었다. 권용목씨가 중심이 된 이 모임은 서서히 작업장의 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 노동관계 서적을 탐독하다 85년 「우리 힘으로 현장문제를 개선하자」는 목표로 「2·4회」로 개칭한다.

이런 배경에서 86년 12월 현대엔진 회사측이 노사협의회 노사위원의 자격을 입사 후 5년이 지난 자, 인사고과 중급이상자 등으로 제한하자 노동자들이 집단행동으로 이를 거부하는 일이 일어났다. 노사협의회는 74년 현대조선소 시위사건으로 노동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발족됐으나 사실상 회사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구에 불과한 상태였다. 노동자들이 집단행동을 통해 노사위원의 자격제한을 완화시키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일은 향후 노동운동의 중대한 출발을 예고했다.

8월 8일 현대그룹노조 협의회가 결성, 권용목 현대엔진노조 위원장이 의장으로 선출돼 8월 17, 18일 총파업을 주도하는 등 현대엔진 노조는 현대중공업과 함께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89년말 회사가 현대중공업에 합병됨으로써 2년의 짧은 역사를 마감했지만, 민주노조운동의 신호탄이자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기자

/송용창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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