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가 높을 수록 더 많은 책무를 진다」고 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즈는 서양사람들의 행동규범이다. 서구사회에서는 글자그대로 지체가 높으면 높을 수록, 혹은 재산이 많으면 많은 사람 일수록 국가나 사회에 대해 더 많은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된다. 민주주의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정착하기 까지에는 이같은 지도층의 수범(垂範)이 있었다.그러나 우리사회는 언제부터인가 힘이 세면 셀 수록, 혹은 돈이 많으면 많을 수록 국가나 사회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풍조가 자리잡았다. 1년수입이 수억원대나 되는 의사의 세금이 고작 2백만원 정도의 월급장이가 원천징수 당하는 세금액과 같았다는 얘기는 얼마전 신문에도 났다. 법 집행에 대한 일반의 불신감정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로 대변된지 오래다.
29일 병무청이 사상처음으로 공개한 고위공직자의 병역 내용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지위가 높을 수록 병역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장·차관과 국회의원등 고위공직자 10명중 3명이 병역을 면제받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또 이들은 자신의 당대에만 그치지 않고 직계비속의 대에서도 각종 석연치 않은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은 비율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포클랜드전쟁때 영국왕실의 왕자가 제일먼저 전장에 투입된 사실과 비교되는 현상이다.
이른바 특권층일 수록 각종의무를 등한시한다는 세간의 추측은 틀리지 않은 셈이다. 국회의원 아들의 현역복무율이 55%에 불과하고 병무청 간부아들의 병역면제율이 의원 아들 다음으로 높다는 사실도 이를 말해 준다.
병역면제자들의 면제사유중 절반이상이 질병이다. 우리사회의 고위공직자나 돈많은 사람들의 자제가운데는 왜 그렇게 건강하지 못한 청년들이 많은 것인지 이해가 안된다. 보통 상식으로는 이들이 일반인들에 비해 학력수준도 월등히 높고 영양상태도 크게 양호해야 맞는 것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각종 질병으로 인한 병역면제자가 훨씬 많은 것이다. 병무행정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 이들의 면제사유등이 먼저 재점검돼야 할 이유다.
우리사회가 보다 투명해지기 위해서는 병역실명제 못지않게 병역부조리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 있어야 한다. 시작단계에서는 서릿발 같다가도 세인의 관심권에서 멀어지면 솜방망이로 변해 버리는 병무비리 처벌관행도 고쳐져야 한다. 또 병무비리는 끝까지 추적, 발본색원 한다는 당국의 결연한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통령의 엄단지시 마저 때때로 굴절되는 상황아래서는 병역비리의 근절은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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