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이나 묵은 건지는 나도 몰래요. 아-하! 아주머니 손대지 마시래요. 냄새라도 맡으려면 1,000원씩 내래요』끝을 묘하게 말아올리는 강원도 특유의 사투리가 인상적인 김종복할아버지의 좌판은 시끌시끌하다. 김할아버지가 며칠전 깊은 산속 비탈에서 캐낸 아이 머리만한 산더덕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누런 골판지 위에다 「산더덕, 50만원. 만지지 마세요!」라고 시커멓게 글씨를 써 놓았다.
『서울양반, 저거 남자한테 아주 끝내주는 거래요. 호호호. 50만원이면 거저래요, 거저』
옆 좌판의 아주머니가 한마디 거든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정가」 때문인지 정작 흥정에 나서는 사람은 없다. 사실 산더덕은 얼굴마담 격. 더덕을 보고 모인 사람들이 장뇌삼, 황기, 산다래, 산초, 저우살이, 동덩굴 등 도시에서 보기 힘든 물건들을 봉지봉지 사간다. 올해 일흔넷인 김할아버지는 직접 산에 올라 팔 것을 채취한단다. 날이 궂으면 집안에서 고무줄 새총이나 다듬이방망이를 깎고 장날이면 좌판을 벌인다. 많이 벌면 하루 수입이 20만원. 산골 노인의 벌이치고는 만만치 않다. 해질 녘, 두둑한 전대를 쓰다듬으며 자리를 걷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스친다.
강원도 첩첩산중 정선 5일장(끝자리수가 2, 7일)은 풋풋한 시골 인심과 산골의 진귀한 산물이 풍성한 곳이다. 종합시장이지만 봄에는 산나물, 가을에는 약초가 유명하다. 읍내에 약초시장이 따로 생긴 이후 가을 약초는 다소 위축된 느낌. 그러나 여전히 도시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하다.
정선장의 주된 품목은 해발 500~700㎙의 비탈에서 자라는 고랭지 청정 농산물과 미식가들을 유혹할만한 기호식품. 요즘은 가을걷이한 싱그런 푸성귀가 가게마다 그득 쌓여있다. 옥수수, 고추, 마늘, 밤과 더불어 젖은 이끼에 소중하게 싸놓은 윳가락만한 송이버섯, 기생했던 나무의 살이 그대로 붙어있는 영지버섯, 중국산과 뚜렷하게 구분이 가는 「정선산 우엉」등이 인기상품이다. 촌 다운 멋스러움도 놓칠 수 없다. 이제는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짚신은 물론, 검정고무신과 빨간 내복, 무쇠솥등이 쉽게 눈에 뜨인다.
장터의 감초는 뭐니뭐니해도 먹거리. 강원도의 음식은 호남의 농익은 맛, 영남의 자극적인 맛과는 달리 질박하고 담백한 것이 특징. 정선장에서 맛볼 수 있는 강원도 음식들이 그 특성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으뜸 재료는 메밀. 메밀묵을 비롯해 메밀국수, 메밀전병, 메밀부침등이 도회지 방문객들을 잡는다. 무미(無味)에 가까우면서 음미할수록 입 속에 깊은 향기가 맴돈다. 얼음에 채워놓은 막걸리 한사발을 곁들이면 장터의 표정이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규모가 2,300여평에 불과한 정선장은 3월부터 철도청이 운행하는 「정선5일장 관광열차」 덕분에 크게 유명해졌다. 그래서 급격하게 도시의 때를 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운한 마음도 없지 않다. 장바닥 한가운데 내걸인 플래카드의 「정선장 관광열차 2만명 돌파」라는 문구가 시골 인심과는 다르게 은연중 장삿속을 내비치는 듯했다.
■유명 5일장
급속한 도시화와 농촌인구의 감소로 우리의 전통 5일장은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87년 전국 755곳에 달했던 5일장은 95년에는 588개소로 줄었고 현재는 500곳을 넘지 못한다. 이러한 쇠락분위기 속에서도 개성을 살려 유명세를 타고 있는 5일장을 소개한다.
■ 모란장(경기 성남시)
성남은 물론 서울시민에게도 유명한 장. 국내 최대규모를 자랑한다. 화훼, 가축, 잡화, 곡류, 의류등 없는 게 없는 만물시장이다. 명물은 고추와 각종 애완견을 포함한 가축류. 고추의 경우 음성이나 영양등 유명 산지와 직거래하기 때문에 생산자들과 직접 흥정할 수도 있다. 각설이타령을 부르거나 원숭이를 앞세워 손님을 모으는 상인 등 볼거리도 많다. (4, 9일)
■ 강화장(인천 강화군)
화문석, 순무, 인삼등 강화의 특산물과 연안의 해산물이 유명한 곳. 강화의 풍부한 관광자원과 더불어 명물이 됐다. 대표적인 상품은 화문석. 강화 주민들이 직접 손으로 만든 화문석을 내다 파는데 대량 유통되는 상품보다 10~20% 정도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다. 올이 쫀쫀하고 무늬가 수수하다. 뿌리에 보랏빛이 도는 순무는 깍두기를 담그면 별미.(2, 7일)
■ 북평장(강원 동해시)
동해역(옛 북평역)전에 펼쳐지는 대규모 5일장. 태백산맥의 산물(山物)과 동해의 해물(海物)이 한꺼번에 모인다. 금강산 가는 유람선이 동해항에서 출발하면서 최근 크게 알려졌다. 자랑거리는 역시 해산물. 싱싱함과 저렴한 가격이 매력이다. 요즘, 방어의 경우 1㎏이 넘는 횟감 한마리가 단돈 1,000원. 고등어는 6-7마리에 1,000원이다. (3, 8일)
■ 구례장(전남 구례군)
지리산에서 쏟아내는 각종 산나물과 한약재, 토종꿀이 모이는 장터. 특히 산나물이 나는 봄이면 발디딜 틈도 없이 북새통을 이룬다. 김장을 준비하는 이맘때에는 남도의 곰삭은 젓갈류도 구경할 수 있다. 지리산과 화엄사를 근처에 둔 오랜 관광지이지만 옛 인심과 풍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5일장이다. (3, 8일)
/권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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