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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 쓴다] 6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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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 쓴다] 6월항쟁

입력
1999.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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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로(李康老·전주대 사회과학부 교수)◆80년대의 정치상황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80년 5월 광주항쟁의 유혈진압으로 분쇄하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장군은 군사독재지배에 대한 재야와 학생운동의 도전을 강압적으로 탄압했다. 그러나 85년 2월 12대 총선에서 선명야당인 신한민주당이 등장하자 더이상 노골적인 탄압만으로 반대세력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김대중씨와 김영삼씨에 의해 지도된 신민당은 전두환 정부를 압박하여 86년 2월 국회내 개헌특위를 구성할 수 있었지만, 87년 봄까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달성할 수 없었다. 한편 전두환 정부는 야당에 대한 대처와는 별도로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계속 물리적으로 탄압했는데 그 과정에서 인권유린 사태를 빈번히 야기했다. 특히 87년 1월 비운동권 학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는 공권력의 폭압성을 국민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러한 군부지배세력과 대항세력간의 갈등은 87년 4월 13일 전대통령의 호헌조치를 계기로 타협할 수 없는 대결상태로 치달았다. 87년 4월 집권세력은 양김씨가 주도하는 통일민주당의 결성을 깡패를 동원하여 노골적으로 방해했으며, 87년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축소·은폐의 폭로로 전두환 정부의 도덕성은 최악의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권력을 연장하려는 5공집권세력과 이에 대항한 민주주의를 위한 반대세력의 갈등은 87년6월 전면적인 대결국면을 형성했다.

◆6월항쟁의 전개

「6월민주항쟁」은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5월 27일부터 6월10일까지로 양측이 자기세력을 결집·강화하면서 각자의 정치노선에 매진한 시기였다. 전정부는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면서 5공헌법에 따른 정치권력 인계작업을 자신의 정치일정에 따라 추진했으며, 민주화 대항세력은 5월27일 각계 및 지역대표 총 2,191명으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민본부)」를 발족시켜 독재정치의 종식과 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한 투쟁을 준비했다. 국민본부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요 단체와 조직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들은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으며 투쟁을 이끌었다.

제2단계는 6월 10일부터 18일까지로 양세력이 각자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정면충돌한 시기였다. 집권 세력은 6월10일 노태우를 민정당 대통령후보로 공식 선출했으며, 민주화 추진세력은 같은 날 「6·10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규탄 및 민주개헌쟁취 범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했다. 국민본부가 주최한 이 집회에는 대학생과 일반시민이 가세하여 전국 22개 지역에서 23만여명이 참여했으며, 1,000여명은 서울 명동성당에서 15일까지 농성을 계속하여 서울에서 시위를 지속시킬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집권세력은 민주화세력에게 대화를 제의했으나 그것은 민주화세력의 요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대항하여 반대세력은 6월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정하고 전국적으로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개최했는데, 전국 대도시에서 8만6,000명이 참여한 격렬한 심야시위로까지 발전했다. 이러한 전국적인 시위에 놀란 집권세력의 일부가 18일부터 직선제개헌의 수용여부를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제3단계는 6월19일부터 29일까지로 집권세력과 반대세력간의 대결이 타협으로 귀결된 시기였다. 국민의 대규모 저항에 대해 권력핵심세력은 6월19일 군을 동원하여 진압하려고 시도했으나 전대통령이 군 일부와 미국의 반대로 군동원을 포기하자 민주화세력의 요구를 수용하는 시국수습이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6월24일 전대통령과 김영삼총재의 청와대회담에서 구체적인 성과가 없자 민주화세력은 6월26일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을 전국적으로 개최했다. 이 대회는 전국 30여개 시·읍에서 진행되어 총 130만명이 참가했다. 결국 집권세력은 「항복」이라고까지 지칭한 8개항의 6·29선언을 노태우후보가 발표하고서야 민주화를 위한 국민항쟁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6월항쟁의 성공 요인

6월10일부터 19일동안에 걸친 국민의 지속적인 항쟁으로 결국 전두환정부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6·29선언이란 형식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즉 6월민주항쟁이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 쟁취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6·29선언의 주체논쟁은 노태우 후보의 대국민 이미지가 개선되었다는 점 외에 그 역사적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6월민주항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우선 근인으로 첫째 민주화 추진세력이 「민주헌법 쟁취」라는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성공적인 이슈로 대동단결한 것이다.

둘째 전두환 정부의 진압수단의 고갈이었다. 민주항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6월 중순 군을 동원하여 국민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제2의 광주유혈사태」를 우려한 군 일부와 미국의 반대로 더 이상 강압책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6월민주항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유신체제 이후 독재권력에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성장한 국민의 힘에 기인한다. 비록 전두환 정부가 경제적인 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유혈집권과 집권기간 중의 반민주적인 억압은 끊임없는 국민의 투쟁을 야기했으며 결국 결집된 국민의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정치사적 의미

그러면 6월민주항쟁이 지향한 것은 무엇인가? 6월민주항쟁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라는 이름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듯이, 이 땅에 국민주권에 근거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 비록 국민본부에는 민중민주주의 세력을 포함한 다양한 정치세력이 참여했지만, 그들을 단결시킨 투쟁의 공동목표는 한국에서 군사독재의 종식과 민주주의의 실현이었다. 이런 점에서 「6월 민주항쟁」이 성공했다는 것은 중요하다. 국민의 대대적인 6월항쟁에의 참여로 한국정치에서 근대적 의미의 시민사회가 본격적으로 등장했으며, 민주화가가 돌이킬 수 없는 시대적 조류로 확립됐다. 즉 6월민주항쟁 결과 국가권력에 의한 전사회의 획일적 지배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고 한국사회는 다원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87년 12월 대선에서 12·12사태의 주역이고 5공의 핵심었던 노태우씨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민주화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6월항쟁은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6·29선언이 포함하고 있지 않은 내용들에 더 주목해야 한다. 즉 6월민주항쟁 직후 국가의 억압기능이 약화된 상태에서 7~8월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요구를 위한 투쟁을 전개했고, 이로 인해 한국의 시민사회의 범위와 내용이 확대됐다. 또 80년대 후반에 등장한 통일운동은 한국사회의 이념적 지평을 확장시켰으며, 90년 독일 통일과 더불어 「통일」이 더 이상 추상적 담론이 아닌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했다. 그리고 환경문제·대미관계 등과 같이 독재권력에 의해 금지되었던 많은 이슈들이 공개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장이 마련됐다.

그러나 6월민주항쟁의 결정적 한계는 시민사회의 힘이 김대중·김영삼씨의 대선전(大選前) 분열을 방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양김의 분열은 군부집권세력이 권력을 연장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결국 양김씨는 그들의 타도대상이었던 구 군부세력과 연합하여 집권할 수 있었다. 더구나 양김의 분열은 이미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균열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즉 한국의 민주주의는 87년 6월민주항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파행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것이 6월항쟁의 한계였다.

◆필자 약력

▲56년 원주 출생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매디슨) 정치학박사 ▲현 전주대 사회과학부 조교수 ▲논문 「한국의 민주화와 사회운동: 관료동원체제의 역동성」, 「김영삼의 지도력 유형」, 「제3공화국(1963-1972) 정치제도의 정통성과 박정희 정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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