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지면을 보면 요즘도 거의 연일이다시피 각종 비리가 터져 나온다. 울화가 치민다. 구정물은 언제까지 이렇게 자꾸만 쏟아져 나올 것인가. 언젠가는 온 나라가 하얗게 표백될 땟국인가. 새 천년을 맞으며 모든 묵은 비리를 다 털어내기 위한 세기의 대청소인가.그러나 그런 기대를 걸만한 가망이 안보인다. 표적적이고 산탄(散彈)식인 이런 사정만으로 온 나라가 깨끗해지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지금 이 나라는 구정물에 세탁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씻어도 씻어도 구정물은 얼마든지 나올 것 같다. 깨끗이 씻어낼 맑은 물이 필요하다.
IMF사태를 맞았을 때 온 나라는 실의에 빠졌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의 대전기라고들 했다. IMF위기를 초래한 것은 그동안 쌓이고 쌓여온 오만가지 병폐가 원인이요, IMF체제는 이 적폐들을 일소할 절호의 계기요, 이 기회만 잘 살린다면 IMF의 수렁이 없었던 것보다 오히려 더 나을 수 있다고들 믿었다. 다시는 그런 위기를 맞지 않을 만큼 건강한 나라가 되어 있을 희망에 위기를 맞은 고통은 위안받았다.
참으로 좋은 찬스였다. 나라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이 이렇게 하나가 된 적이 없었다. 정부로서도 국민을 이끌기에 이렇게 편한 때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국민통합의 그 아까운 호기가 자꾸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고 있다.
IMF사태를 극복했다고들 한다. 원상회복이 되어간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원상회복이 문제다. 원상으로 돌아와서는 안될 것들까지 원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IMF사태를 초래한 여러 악폐들이 회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연일 터지는 각종 비리뿐 아니라 낭비와 과소비 풍조를 봐도 그렇다. IMF사태 이전 수준으로 복귀해 있다. 환란(換亂)은 극복했을는지 모르지만 나라의 환란(患難)은 그대로 남아 있다.
정부는 개혁을 떠든다. 지금까지 개혁을 외치지 않은 정권이 없지만 IMF사태와 함께 출발한 현 정권만큼 개혁의 여건이 완비된 때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어느 구석 하나 시원하게 개혁된 것이 없다. 그 여건을 십분 활용하지 못한 채 IMF위기를 이겨냈다고 자랑만 늘어놓는 사이 개혁의 여건은 자꾸만 어려워져 가고 있다. 한번 놓친 기회는 다시 붙잡기 힘들 뿐 아니라 그 기회 이전보다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
현 정권은 「제2의 건국」을 깃발처럼 내걸었다. 범국민적 의식개혁운동을 벌인다던 제2건국위는 발족한지 1년이 지나도록 예산 낭비만 하고 있다. 지금 무슨 국민운동을 하고 있는지 아는 국민이 없다.
건국의 세기가 저물어가고 있다.
흔히 우리사회 우리국민의 일그러진 구조와 의식을 논란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개발연대의 유산으로 치부한다. 정경유착도 부정부패도 다 그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발독재가 그 경제건설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회악의 출처인 것 처럼 인식되어져 있다. IMF사태만 해도 그것은 그 시대 이래의 폐단들이 퇴적된 결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개발연대 이전의 우리나라는 청정했던가.
광복이후 해방공간과 건국과 6·25와 재건의 시대를 지나는 동안 오늘날 우리 사회의 원형질(原形質) 같은 것이 형성되었다. 가난했으므로 피나는 생존경쟁이 있었고 그 생존의 법칙이 당시로서는 곧 게임의 규칙이었다. 그 빈곤연대는 단적으로 가짜와 사바사바와 빽의 시대였다.
진짜는 추방당하고 정의는 멸시되었다. 사기와 폭력과 불의가 강자요, 물신주의와 이기주의와 파벌주의가 지도이념이었다. 그러던 것이 개발연대의 경제성장을 거치는 사이 빈곤의 악폐는 그대로 물려받은채 부(富)의 크기만큼 사회는 더 썩게 되고 사치와 낭비의 졸부근성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따지자면 광복 이전부터일 것인가. 나라가 일제에 침략당한 것도 거짓말 잘하고 신용없고 시기하고 이기적이고 단결력 없고 사회성이 부족한 우리의 민족성 때문이라고 간파한 선각자가 있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20세기는 「버리고 싶은 유산」의 세기다. 치욕과 함께 영광도 이룩한 20세기 국사의 그늘에서 독버섯처럼 습생(濕生)한 우리 사회의 병폐들은 「세기의 유산」이다. 이 유산들을 깡그리 이 세기와 함께 버려야 한다. 이대로는 무슨 헛소리로 외쳐댄들 새로운 천년은 우리 역사의 것이 아니다.
실로 언제까지일 것인가. 이 부정과 비리와 부조리는 어느 천년까지일 것인가.
/김성우 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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