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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잊지못할 일] 서울서 평양까지 '무전 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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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잊지못할 일] 서울서 평양까지 '무전 도보'

입력
1999.10.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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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소년이 서울서 평양까지 무전도보한 악몽을 잊을 수 있을까. 나는 1909년 평남 용강군 삼화면 주림리 경방에서 출생했는데 불행히도 다음해에 아버지가 타계했다.편모 슬하에서 자라면서도 6살때 천자문을 배우고 10살때 4년제 삼화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15살 되던 해 봄 무사히 졸업을 했다.

하지만 상급학교 진학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고, 농토가 없어 농사도 지을 수 없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 끝에 가출을 결심했다.

철부지가 엉뚱하게도 일본 도쿄(東京)로 가 고학을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16살 나던해 봄 평남선 진지동역에서 도쿄행 표를 사 부산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부관연락선을 타지 못했다. 몇해전 관동지진으로 죄없는 많은 한국인이 살해돼 한·일 민족감정이 극도로 악화됐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부산_도쿄의 배삯과 차삯을 반환받아 상경했다. 혹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노숙걸식하며 며칠을 방황했지만 구세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번에도 문전걸식하면서 무전 도보 여행이었다.

개성 부근에서는 내 또래 아이를 둔 집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또 토목공사 인부 합숙소에서도 하룻밤 신세를 졌는데 인부들이 나에게 노래를 시키기도 했다. 사람 하나 없는 산길을 공포속에서 걸으며 눈물을 참기위해 이를 악물기도 했다.

지루하고도 험한 길을 걸어 10일만에 평양에 입성했다. 그러나 남아가 뜻을 세우고 고향을 떠났거든 뜻을 이루지 못하면 사불귀(死不歸)라는데 무슨 면목으로 들어갈 것인가.

생각 끝에 귀가를 단념하고 무슨 일자리가 없을까 거리를 헤메다 요행히 장국밥집에서 심부름을 하게됐다. 한해동안에 약간의 돈이 모여 밥집을 그만두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17살 때였다. 천우신조인지 서점에 취직해 있던 보통학교 동창생 이태식(李泰植)의 도움으로 지금의 견지동에 있는 선문옥이라는 서점에서 일하게 됐다.

이를 인연으로 26살때 지금의 인사동 수도약국 자리에 금항당(金港堂)이라는 서점을 냈고 그뒤 통문관(通文館)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이겸노=상암산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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