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마냥 진지해지기만 하는 것도 신물날 때가 있다. 그래서 재미를 얻고, 웃기로 작정하고 책을 보겠다면? 수다하게 쏟아져 나오는 유머책이나 만화책을 읽는 것은 가장 손쉬한 결정이다. 찾아보면 방법이야 여럿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손에 든다면 당신은 꽤 고상한 축에 들어간다.「장미의 이름」 「푸코의 추」 「전날의 섬」 등 현학으로 가득 찬 소설과 기호학자, 문화비평가로서 에코의 모습을 이 책에서 보겠다면 절반은 잘못 시작한 것이다. 책에서 그는 전혀 심각하지 않다. 문화비평서라거나 책의 부제처럼 세상을 비틀어 보는 글이라고 해야 할 50여 편의 짧은 글에서 그는 예전처럼 학자연하는 모습을 별로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기발한 일화들을 지어내고 갖은 익살까지 떨어가며 독자들에게 웃음을 안겨주려고 애쓰고 있다.
에코는 뉴욕 거리를 걷다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아주 낯익은 사람을 보았다. 어쨌든 인사를 해야겠는데 코 앞에 다가설 때까지 그가 누군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악수나 하고 보자고 손을 쓱 끄집어 내는 순간 생각이 났다. 영화배우 앤서니 퀸이었다. 물론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다.
그러면서 에코는 「유명인을 만났을 때 반응하는 방법」 이라는 익살을 부린다. 「(거리에서 만난) 앤서니 퀸의 멱살을 잡고 공중전화 부스로 끌고 간다. 그런 다음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누구를 만났는지 알아? 한 번 맞혀 봐! 바로 앤서니 퀸이야. 그런데, 이 자는 영화 속에서 걸어나왔는지, 꼭 진짜 사람 같아』(그러고 나서는 앤서니 퀸을 옆으로 밀쳐 버리고 내가 하던 일로 돌아간다)」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면 그냥 한 번 웃고 말테지만 에코는 이런 유머를 늘어놓은 데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처음에 매스 미디어는 우리로 하여금 가상 세계를 현실로 믿게 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현실을 가상으로 여기게 한다.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우리는 몇몇 철학자의 주장과 비슷한 이런 식의 생각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세계에는 오로지 우리만이 존재하며 우리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신이나 악마가 우리의 눈앞에 투사한 영화일 뿐이라고」.
전혀 심각하지 않게 시작했지만 글을 읽다 보면 그가 심각하지 않은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행하기, 서로를 이해하기, 스펙터클 사회에 살기,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대처하기, 정치적으로 반듯한 사람이 되기, 책과 원고를 활용하기, 미래에 대처하기 등으로 나뉜 글에서 그는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범람을 비꼬기도 하고, 쓸모없는 제품 사용설명서에 비난을 퍼붓는다. 인터넷에서 포르노 사이트를 찾다가 실패한 이야기가 등장하는가 하면 세상 모두가 바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죽음을 담담하게 맞을 수 있다는 인생의 충고도 들려준다. 정곡을 찌르며 쏘아대는 현대 문화와 사회, 사상에 대한 비판이 가득 담긴 책이다. 95년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원재길 옮김)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가 이번에 새 글을 보태어 200쪽 가량 분량을 늘려 새 번역에 다른 이름으로 나왔다.
/김범수 기자
**에코의 세상 비틀어 보기**
■미국에서 기차는 탈 수도 있고 안 탈 수도 있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기차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관한 막스 베버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가난한 사람으로 남는 실수를 범한 죄에 대한 벌이다.(미국 기차로 여행하는 방법, 48쪽)
■(축구에 대한) 그런 광기는 궤양과 같은 것이라서 가난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부자들도 걸릴 수 있는 병이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다는 것을 그토록 확고부동하게 믿고 있는 자들이 다른 지방에서 온 축구광을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고 드니 말이다. 마치 극우 연맹의 지지자들이 이렇게 지껄이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아프리카인들이 우리에게 오도록 내버려둬라. 그래야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줄 수 있을 테니』(축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 146쪽)
■만일 당신이 사형에 찬성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마땅히 사형수가 버둥거리고 껄떡거리고 지지직 타들어가고 소스라치고 움찔거리고 콜록거리다가 저의 더러운 영혼을 하느님께 되돌리며 숨을 거두는 장면을 보아야 한다. 옛날에는 처형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 표를 샀고, 죽어가는 사형수를 보면서 미친 듯이 좋아했다. 당신 역시 사형이라는 최고의 정의를 지지한다면, 먹고 마시면서, 아니면, 무엇이든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좋아해야」 마땅하다.(텔레비전에서 교수형 생중계를 보는 방법, 163쪽)
■영화관으로 들어가라. 만일 배우들이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면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늑장을 부린다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포르노 영화이다.(포르노 영화를 식별하는 방법, 178쪽)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다. 한 편에는 매킨토시 지지자들이 있고, 다른 편에는 MS-DOS로 운용되는 PC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맥은 가톨릭이고 도스는 프로테스탄트이다.(어떤 소프트웨어의 종교를 알아보는 방법, 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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