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 가운데에는 더러 이 가을에 펴낸 내 시집 「다시 말의 오두막집 남쪽 언덕에서」(다층 발행)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이 시집이 금년도 「윤동주 문학상」 수상작품집으로 선정된 데다, 여타 시집들과 달리 「언어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게다.가령,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이라는 작품 앞부문만 해도 그렇다. 「말 속에는 말이 있고/말 밖에는 말이 있고//말과 말 사이에는 빌딩이 있고/빌딩과 빌딩 사이에는 구멍가게가 있고…」 하는 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가 이렇게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92년 여름부터이다. 그러니까, 제3시집을 준비할 때이다. 원고를 정리하다가 보니 내 시의 언어들이 하나같이 활자의 탈을 쓰고 누워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밤마다 제주도 서부산업도로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는 어음(於音)이라는 마을 입구 풀밭에 차를 대고 남미 인디오들의 쿠스코(CUSCO) 음악을 들으면서 육체를 상실한 언어들을 치유할 방법이 없는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바다여!」하고 부르면 파도가 달려와 부서지고, 「사랑하는 사람이여, 외로워!」 하면 하이얗게 눈을 흘기며 알몸으로 돌아눕도록 만들고 싶다는 게 내 꿈이었다.
그러다가 그런 언어를 구사하려면 내 마음이 먼저 순수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인들의 언어마저 기호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고정관념에 의해 모든 것을 생각하고, 또 언어를 단지 의사전달의 도구로만 보는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나는 그해 여름부터 자주 초원으로 갔다. 그리고는 하늘거리는 풀이파리 끝에 「보름달」이라는 낱말을 걸어놓고, 「달아 뜨거라, 달아 뜨거라!」를 기도하듯 되풀이하고, 그러다가 심심한 날이면 전설 속의 미인들을 불러 희롱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캄캄한 그믐밤인데도 보름달은 아니지만, 눈썹만한 초생달이 뜨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시집의 작품들은 지난 7년 동안 마음을 닦고 기도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윤석산. 시인·제주대교수·시집 「나는 왜 비 속에 날뛰는 저 바다를 언제나 바다라고만 부르는걸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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