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국내의 정파적 알력으로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을 거부한 것은 국제 사회의 합의를 무시한 무책임한 행위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유일한 「슈퍼파워」로서 리더십을 행사하겠다는 미국이 오히려 대세를 거슬러 새로운 고립주의 경향을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대두되고 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도 13일 밤 긴급 기자회견에서 핵실험금지정책의 고수 방침을 재확인하면서 『이번 비준안 부결 사태를 신고립주의(New Isolationism)의 증거』라고 공화당을 강력히 비난했다.CTBT 비준안의 부결은 대체로 클린턴 대통령이 규정한대로 「최악의 당파주의 정치의 산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그동안 국제 규범의 적용에 있어서 자국의 이해에 기초해 수시로 자의적이고 선별적인 입장을 취해온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이같은 「일탈행위」는 그 뿌리가 깊을뿐더러 최근 들어서는 안보와 경제통상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의 출범을 주도했으나 정작 베르사이유 조약을 비준하지않았고 물론 회원국으로 가입하지도 않았다. 국제연맹은 무력감 속에 곧 와해됐고 또다른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단초가 되었다. 이처럼 미국이 220년의 역사에서 국제조약 내지 협약의 비준을 거부한 사례는 모두 21번인데 안보 내지 군축 관련 사안의 경우는 베르사이유 조약 이후 이번이 처음.
행정부쪽도 사정은 마찬가지. 세계무역기구(WTO)의 창설에 앞장 선 것은 미국이었으나 철강 농산물 등 통상 일선에서는 자국법을 우선하면서 교역 상대국을 몰아세워 WTO에서 시비거리가 되는 사례가 허다하다. 지난달 WTO는 미국에게 수출관련 세법의 개정을 요구했고 이달에는 호주가 자국산 양고기에 대한 미국의 수입제한 조치를 WTO에 제소했다. 한국도 스테인레스 제품에 대한 미국의 반덤핑 판정 등과 관련, WTO에 제소해 놓은 상태다.
미국은 특히 90년대 이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세계화를 위한 개입과 확대를 21세기 대외 정책의 기조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번의 CTBT 거부는 이런 새 조류에도 역행한다는 지적이 무성하다.
김병찬기자
bckim@hk.co.kr
■CTBT 부결, 대선 새 쟁점
미 상원이 13일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안을 전격적으로 부결함에 따라 이번 「수요일의 쿠데타」가 내년 선거의 새 쟁점으로 떠올랐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밤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공화당 지도부의 무책임성을 강력히 비난하고 국제사회에 대해서는 「핵실험 금지정책 고수」입장을 천명했다. 또 대선유세차 시애틀에 있던 고어 부통령도 『내가 대통령이 되면 제일 먼저 비준안을 재상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상 대선을 1년여 앞두고도 미 정가에서는 외교정책에서는 별다른 이슈가 없었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가 이번 사건을 빌미삼아 공화당에 대해 「신고립주의 외교노선」의 문제점을 집중 제기할 뜻을 비침으로써 이제 비준부결 파동은 핵심적인 대선 이슈로 부상했다. 언론과 반핵운동단체등 여론의 질타에 놀란 공화당 지도부도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듯 『고립주의로의 회귀가 아닌 국익에 배치되는 조약을 폐기했을뿐』이라고 해명했다. 이번 사건이 어느 당에 유리하게 작용하게 될지는 인도, 파키스탄등 「핵실험 자주권론」을 펴는 일부 국가가 새로운 핵실험을 강행할지 여부에 달려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또 르윈스키 스캔들이후 고개를 내밀던 이른바 클린턴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클린턴 대통령은 지난달 말 공화당측이 2주일후에 비준안 투표를 강행할 것이라고 발표하자 투표연기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헛수고에 그쳤다.
워싱턴=윤승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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