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8월말 나는 경찰서 보호실에 갇혀 있었다. 그해 5월 시작된 군사반란이 광주학살을 거치며 공식적인 정권장악을 향한 절차를 밟아가는 중이었다. 나는 박정희시절 학생운동때문에 몇번의 징역살이 전력이 있는지라 당연히 수배자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긴장의 70년대를 국가시설에서 보내고 80년 첫날에야 겨우 서울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된 나는 사소한 일로 행동의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살았지만 체포의 그물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몇 달간의 도피생활이 이어지다가 동대문 어느 카페에서 검거되고 말았다.
검거 소식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후배를 통해 즉시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나는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이름도 좋은 보호실에 갇혀 있었다. 밥은 근처 식당에서 주문해 먹었다. 그런데 뒷날 아침 밥을 이고온 아주머니는 바로 어머니였다.
아마 되풀이되는 나의 수배·구속생활에 익숙해진 어머니께서 연락방도를 강구하다 이 식당을 찾으셨을 것이다. 내색을 하면 안되니 조용히 밥을 받아먹는데 밥 속에서 쪽지가 나왔다. 지금의 내 아내가 쓴 편지였다. 내가 무엇을 답답해하는지 잘 알고 쓴 고마운 편지였다. 내가 붙잡힌 그날 나는 그 여인과 만나 남은 인생살이를 거는 담판을 지을 참이었다.
물론 그 사람은 모르는 나 혼자만의 계획이었지만. 밥을 어디로 먹었는지 모르게 처분한 나는 종이를 구하다 담배껍질 속종이에 감사와 함께 간절한 내 심정을 황급히 적어 밥그릇을 챙기러 다시 오신 어머니 손에 조용히 쥐어 드렸다. 어머니를 중개자로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에 내용은 어느덧 백년해로한 부부처럼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3일동안 밥을 나르던 어머니는 무슨 사연이 있어선지 더 이상 오지 않으셨다. 그러나 더 이상 편지가 오가지 않아도 좋을만큼 우리사이는 탄탄해져 있었다. 서울구치소로, 안양교도소로, 전주교도소로 내 여동생 주민증을 가지고 혹시 호칭이 틀리지 않을까 조심하면서 혼자 또는 어머니와 함께 면회를 다니던 그 여인은 이제 아이 둘을 키우며 생활을 책임지는 아주머니가 되었다. 어머니는 위대하다고들 말한다. 어머니 은혜없이 사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만 이제 이승을 뜬 지 6년이 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눈에 이슬이 맺힌다. /김봉우·민족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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