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매향(埋香)」(실천문학사 발행)을 내놓을 때 그 표제가 독자들에게는 버겁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를 표제작으로 내세운 데는 각별함이 그만하였기 때문이다.「향을 묻다」라는 뜻풀이쯤 될 매향은 원래 우리의 오랜 풍속에서 비롯된 말이다. 내세의 발원을 기원하며, 혹은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장차 향이 될 나무를 강이나 바다에 잠가 매장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흐르는 물에, 역시나 물의 생리를 닮아 기약도 없이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의 골짜기에, 섭슬려 사라질 게 뻔한 향을 묻는 일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세의 유한함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을 발현한 것이라 하겠다. 아름다우나 결코 고즈넉한 풍경만은 아니었으리라.
소설 「매향」은 표면적으로는 그 매향 의식(儀式)을 어느 정도 좇고 있다. 그러나 나의 보다 내밀한 욕심은 인간이 이 생에서 얽힌 독한 인연들을 어떻게 끊는가 하는 것을 풀어보는 데 있었다. 죽네 사네 하며 뒤엉켜 살다가 어느날 훌쩍 제 피붙이 하나가 생 밖으로 떠밀릴 때, 죽은 자와 남은 자는 그 「정(情)」을 어떻게 끊을까?
「매향」의 할멈은 내리는 함박눈을 손바닥에 받으며 『요것들도 지들끼리 서로 정을 떼느라고 요렇게 차가운갑다』고 중얼거린다. 그러니까 할멈은 「차가움」으로 서로 정을 뗀다고 믿고 있다. 이런 인식은 우리 민족에게는 꽤나 일반적이었다. 가령, 민간에는 출상 후 한동안 그 배우자나 자녀가 밤이면 방문 밖 출입을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누가 그러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체모를 무섬증이 엄습해서이다. 혹은 꿈에 사자(死者)가 아주 무서운 형상으로 찾아와 오만 정이 다 떨어지게 하기도 한다. 이를 우리는 정을 떼는 과정으로 인식하였다.
그런 쌀쌀함으로 죽은 자가 잊혀지고, 죽음에 이르른 자가 안면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 차가움은 눈물만큼 뜨거운 것이어서 삶의 비의(悲意)를 경험케 한다. 이로 인해 우리네 관계는 더욱 진정한 것이 된다./소설가·94년 실천문학신인상으로 등단·창작집 「매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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